서평/나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인문학의 부흥을 꿈꾸다

강아래쪽마을 2014. 5. 29. 14:20

도서관에서 인문학의 부흥을 꿈꾸다

 

대구 용학도서관 관장 신남희

 

대학에 입학했던 80년대 초반으로 기억한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점만 눈에 띄어 방황하던 무렵, 누군가의 소개로 대구시내 중심가의 한 서점을 찾게 되었다. 열다섯 평 남짓한 작은 규모였지만 그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서점 ‘신우’. 그 작은 서점에서 나는 엄청난 지적 충격을 경험했다. 세상에 읽어보지 못한 책이 그렇게 많은 것을 알았고, 광대한 지식의 세계를 탐험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때 우리는 참 많은 책을 읽었다. 시, 소설, 철학, 경제학, 사회학 등. 강의실에서 교수에게 배운 것보다 벗들과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고, 벗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번민을 나누기도 했다. 미래는 상당히 불안하고 어둡게 느껴졌지만, 주눅이 들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우리는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용기와 신념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무렵 대학가 주변에서 한두 곳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사회과학서점은 이제 사라진지 오래다. 대신 세련된 인테리어의 커피 전문점이나 스파게티 전문점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시절 사회과학서점과 함께 우리 인문학도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터져 나오는 지적욕구의 분출을 감당해낼 마땅한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그 서점들이 책을 공급해주면서 인문학의 부흥을 이끌어내는 은신처 노릇을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인문학이 활기를 띠고 있다 한다. 그동안 우리 책과 서점의 풍토는 많이 변했다. 작은 동네서점과 사회과학서점들이 사라지고 대형서점만 시내중심가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에 대한 솟아오르는 대중의 관심을 감당하고 은신처 노릇을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어떤 사회든 숨 쉴 공간은 필요하고, 아무리 억눌러도 꼬물꼬물 피어오르는 새싹 같은 생명의 움직임마저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사회에는 사회과학서점들이 사라진 자리에 민간에서 만든 작은 도서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서관들에서 인문정신의 부활을 위한 노력이 미약하나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움직임들이 모이고 모여 2000년대 초반 온 나라에 도서관 세우기 열풍이 일어났고, 크고 작은 공공도서관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다 외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전해주던, 시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도서관문화를 부러워하던 우리가 이제 그런 도서관을 집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이 도서관들을 질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형성된 도서관 인프라를 인문학의 부흥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여야 한다. 전국의 도서관들에서 인문학강의를 열고 인문학 공부모임을 만들며, 인문학을 가지고 마음껏 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재미있게 신명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운동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문화운동인 것이다.

그러자면 도서관 사서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호흡하는 책을 읽고 도서관의 역동적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도서관이 많이 생기면서 사서들의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필요한 수만큼 사서들을 채용하지 않고, 사서업무의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서직이 계약직이나 비정규직 일자리로 점점 고착되어가는 경향마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비사서들은 얼마 되지 않는 정규직 사서채용에 목매고 있지만, 미래는 상당히 불투명하다.

이쯤 되면 인문학을 도서관에서 활발하게 꽃피워보자는 제안이 솔깃하지 않겠는가. 스스로의 존재이유를 증명하고 사회적 영향력을 넓혀나갈 때 그 집단은 생존할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도서관에서는 지난해 ‘삶의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한 차례 인문학강좌를 진행하였다. 미술, 역사, 고전, 연극,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가지고 자유롭게 진행하였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높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30명 정원으로 작은 강의실에서 진행하려던 것을 100석이 넘는 시청각실에서 진행해야 할 정도였다. 이후 대구지역의 다른 도서관들에서도 인문학강좌를 진행하였는데, 대부분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 현재 인문학강좌는 문예회관, 박물관, 북카페, 시민단체 등 다양한 곳에서 진행하고 있으며,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강의식으로 진행되는 인문학강의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좀 더 활발한 질문과 토론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다. 인문학 공부모임이 다양하게 생기면 좋겠다 싶다. 그것이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선정되려고 애쓰는 ‘평생학습도시’와 결합되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평생학습도시 조성을 위해 지방자치단체들은 학습동아리 결성, 마을평생학습지도자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런데 현재 평생학습의 내용은 취미나 재취업을 위한 강좌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 ‘책’이 핵심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지역공공도서관을 중심으로 평생교육을 강화하되, 인문학을 주요한 주제로 설정하여 독서모임과 강좌를 병행하여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성인의 독서도 중요하지만, 어린이나 청소년 시절 독서 습관 형성과 책읽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습 부담을 덜어주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을 시간을 제도적으로 마련해주어야 한다. ‘아침독서운동’ 같은 것을 강화해서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책읽기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도서관의 서가를 채우고 학급문고를 알차게 꾸며야 할 것이다. 공공도서관에서는 세계문학 100선 읽기, 우리문학과 고전읽기 같은 운동을 벌이고 자유롭게 책 읽는 분위기를 유도하며, 청소년독서모임을 만들고 토론회를 활발하게 개최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문학 저자와 인문학 출판사가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달라질 것이다. 좋은 차와 집 대신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기쁨을 더 즐기고, 부동산과 재테크가 주요 화제가 되기보다는 시를 읽고 문학을 토론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삶의 물질적 측면보다는 정신적 풍요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경쟁보다는 공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그런 사회는 결국 인문정신이 충만할 때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서평전문지 기획회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