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강아래쪽마을 2015. 2. 10. 07:58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이번 겨울은 심한 추위나 잦은 눈이 없는, 비교적 평온한 날씨를 보였다. 삶의 벼랑끝에 있는 사람들이나 길에서 그들의 요구를 호소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겨울이 가혹하였을 것이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밀란 쿤데라는 스테디셀러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이르는 동안 그는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해왔고, 최근에는 <불륜>이라는 소설을 펴내 다시금 잔잔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오래전에 영화로 보았다. 한 20여년도 더 전, 아직 많이 젊었을 때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 주연의 <프라하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고, 난 비디오로 이 영화를 봤다.

줄리엣 비노쉬의 젊고 풋풋한 아름다움과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창백한 얼굴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이 책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러시아에 체코인들이 저항한 민주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8년.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68혁명이라는 젊은이들의 격렬한 반체제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전세계적으로 참 뜨거웠다. 미국에서도 베트남전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65년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전국 대학가를 휩쓸었던 시기에서 멀지 않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학자인 아버지를 둔 명문가 집안의 밀란 쿤데라는 러시아의 침공과 전체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며 저항하였다. 두번의 공산당 추방과 체코 시민권 박탈로 끝내 그는 아내와 파리로 이주한다

파리에서 줄곧 작품을 발표해온 그는 아직도 건재하다.

 

이 작품은 의사인 토마스와 그의 아내인 테레사, 화가인 사비나, 대학교수인 프란츠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정치체제와 권력이 인간에게 미치는 힘앞에서 한없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개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별것도 아닌 간략한 논평때문에 유능한 외과의사에서 유리창 청소부로 전락해버리는 주인공 토마스가 탐닉하는 성은 권력에 조롱 혹은 희화화처럼 보인다. 온갖 여자들에게서 신비를 탐구하는 토마스에게서 한없이 가벼운, 그래서 참을 수 없는 삶을 견디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테레사는 그런 토마스를 견딜 수 없어 한다.

토마스는 어느 날 자신에게 우연히 온 테레사를 누군가 광주리에 담아 자신에게 보낸 어린 아이처럼 느낀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를 반복적으로 생각한다.

 

범죄자 정권들은 범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상천국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방법을 그들은 격렬하게 옹호하여 그 대가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그 후 지상천국이란 없으며, 결국 광신자들은 살인자로 드러났다.

너희들은 나라의 불행과 나라의 자주성 상실에 대한, 죄없는 사람들을 사형에 처한 데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대해 고발된 자들은 대답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며, 우리는 기만당했고, 우리들 마음 밑바닥은 결백했다고.

작가는 묻는다. 그들은 그것을 정말 몰랐던가? 아니면 다만 그들이 그것을 몰랐던 것처럼 했는가?

작가는 '그들이 그것을 알았는가 아니면 알지 못했는가?'가 아니고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죄가 없는가? 왕좌에 앉은 바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책임에서 면제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자신들의 내면적 순수성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알지 못했다는 무지에 이 나라가 어쩌면 수백 년 동안 자유를 상실하고 만 데 대한 죄가 있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결백하게 느낀다고 외쳐? 어떻게 너희들이 그것을 함께 볼 수 있단 말인가? 너희들에게 눈이 있다면 너희들은 그 눈을 파내고 테베왕국을 떠나야 할 거야!

작가의 이 외침은 오히려 내게는 신선하게 느껴진다. 무기력과 패배감에 빠진 채 아무런 힘도 없어져버린 지금 우리에게는.

절망은 오히려 가망성이 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이제 더이상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념이라고 할까.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작가들도 펜을 놓은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체코의 역사와 프라하의 봄의 세계사적 의미, 토마스와 사비나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68세대 젊은이의 모습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