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도서관이라는 신화
신남희(은평 구산동도서관마을 관장)
청소년과 주민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던 도서관
대구 반월당 삼성생명 빌딩 뒤편에 곡주사라는 오래된 술집이 있었다. 옛날 한옥을 개조하여 막걸리와 전을 주로 팔던 곳인데, 주머니 가벼운 문학청년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술집이었다. 바로 앞 큰길에 YMCA 건물이 있어서 문예반 고등학생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고등학생들이 편하게 갈 곳이 없어서 막걸리집을 드나드는 게 딱해, 뜻이 통하는 선배와 청소년도서관을 열기로 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시내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터라, 모아둔 돈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고민 끝에 살고 있던 자취방 보증금을 털어 도서관 임대 보증금을 치르고, 신간 도서들을 샀다. 중구 봉산동 4층 건물의 꼭대기층 15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서가는 아이들과 직접 만들었고, 도서관을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서 기증한 책들이 더해져 조그마한 도서관은 책들로 가득 찼다. 군대에서 제대하여 막 복학한 과 동기 남학생들이 힘쓰는 일들은 거뜬히 도와주었다.
1989년 7월, 그렇게 문을 연 새벗도서관은 31년째 대구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벗과 시작점이나 동기는 조금 다르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어린이도서관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 시점은 새벗도서관이 중구에서 달서구로 이전하며, 마을도서관으로 성격전환을 해나간 때와 비슷하다.
도시가 커지면서 대단지 아파트들이 도시 외곽에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수만 세대가 거주할 아파트가 들어서도 도서관이나 문화공간은 전혀 고려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논밭이었던 곳을 깨끗이 밀어버리고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빼꼭하게 들어선 신도시의 풍경은 얼마나 황량하였던가. 대규모 공단 바로 옆에 새로 생긴 신도시, 유흥업소와 모텔들이 아파트 주변 상가까지 잠식해 들어와, 발레와 피아노학원, 영수학원과 나란히 한 건물에 입주해 있던 동네였다.
1999년 새벗도서관은 중구에서 이전하여, 유흥업소가 영업하고 있는 건물의 한 층을 빌려 마을도서관을 열었다. 단행본은 아직 드물고, 유아전집을 중심으로 어린이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부족한 아이들 책을 더 들여놓고, 어머니를 위한 아이들 책읽기 강좌를 열었다.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는 방도 만들었다.
“타지에서 남편 직장 때문에 이사 와서 아이들을 키우며 마음 붙일 곳 없이 지내다가 도서관이 생겨서 얼마나 좋던지요. 아이들과 도서관 나들이 하는 게 낙이었어요. 도서관을 이용하다가 이웃 엄마들도 만났고요.”
그때 도서관을 이용하기 시작해 아직도 친분을 이어가고 있는 조은정씨에게 마을도서관은 비로소 동네에 뿌리내릴 수 있게 도와준, 서먹하고 낯선 도시의 비빌 언덕이었다. 아파트 안 커뮤니티 시설도 별로 없던 시절,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책을 읽어주고 이웃도 만날 수 있는 도서관은 꼭 필요한 곳이었다. 젊은 부부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지런히 도서관에 왔다. 자발적으로 후원회원에 가입하는가 하면, 동지 팥죽을 쑤었다며 가져다주기도 했다. 적은 일손에 일이 많아 힘들긴 했지만,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누고 연결되는 마을도서관의 가치와 보람을 온몸으로 체득하는 시간들이었다.
어른들에게는 사는 이야기며, 아이 키우는 정보를 나누고 이웃과 교류하는 곳이었고, 아이들에게는 엄마들이 읽어주는 책이야기에 빠져들거나 친구들을 만나 놀 수 있는 재미난 곳이었다.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던 단행본 그림책들과 재미있는 동화책들이 가득한 도서관은 아이들의 영혼에 깊은 인상을 주었으리라.
대구 달서구로 옮긴 후 새벗은 법적으로 사립공공도서관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지만, 사립도서관보다는 민간도서관, 혹은 마을도서관이라 부르길 좋아했다.
민간·작은 도서관에 대한 세심한 정책 필요
2000년대 초반 방송사와 시민단체가 추진한 기적의 도서관에 시민들이 열렬하게 호응하는 것에 놀란 탓인지, 정치인들이 도서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작은 도서관’도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했다. 작은 도서관이 언론과 정치인들에 의해 자주 호명되기 시작했지만, 그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다.
도서관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급격하게 높아지던 2000년대 초반에 작은 도서관에 대한 개념 정의를 내리고 올바른 정책방향을 제시해주는 전문가들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려운 여건에서도 공공성의 원칙을 지키며 민간도서관운동을 펼쳐온 도서관들을 정책적으로 포용하며, 도서관발전계획을 제대로 세워 추진해나갔다면, 혼란을 조금은 더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정부와 도서관전문가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소명이다.
그럼에도 외려 정부는 앞장서서 공립 작은 도서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부 정치인들도 도서관정책을 제대로 펼쳐나가기보다는, 우선 눈에 보이는 수치에 급급해 작은 도서관 건립에 열을 올렸다. 도서관이라기엔 너무 작은 공간에, 순전히 자원봉사자에 의지해 도서관을 운영하려고 하는 공공의 정책이 참으로 얕고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이때 도서관계 일부에서는 작은 도서관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정책의 관심이 작은 도서관 쪽으로만 지나치게 쏠리는 것을 우려하면서, 작은 도서관이 도서관 발전의 걸림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소명의식을 가지고 도서관을 건립하여 이끌어온 민간도서관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서운한 말이었다. 작은 도서관 운동을 해온 사람들은 작은 도서관이 본래 성격과는 무관하게 지나치게 진흥되는 것을 우려하여 ‘지금은 작은 도서관을 진흥할 때가 아니라, 진정할 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공도서관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공공도서관들도 과거의 관료적인 운영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기에 일부 민간·작은 도서관들은 책을 읽고 빌려가는 도서관으로서는 물론이고, 지역문화공간이자 사랑방으로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관이 만든 작은 도서관은 민간·작은 도서관의 본질적 성격과는 어긋나는, 그저 규모가 작고 도서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직원이 없거나 작은, 보여 주기 식 도서관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2016년 작은 도서관 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작은 도서관과 관련한 논란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2018년 기준 도서관통계에 따르면 등록된 작은 도서관 수는 6,332개소이다. 공립은 1,433개소이고, 사립은 4,897개소이며, 서울의 작은 도서관은 558개소이다. 공공도서관은 전체 1,096개소인데, 이중 교육청 233개소, 지자체 840개소, 사립 23개소인 것에 비해 6배나 많은 숫자이다.
작은 도서관은 뜻있는 개인이나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파트 내 작은 도서관,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들이 더 많다. 영어나 논술학원에서 서가를 비치해 작은 도서관으로 등록하는 경우도 꽤 있다.
아파트 작은 도서관은 잘 운영되는 곳도 있지만, 입주자대표회의의 특성에 따라 외부 주민들의 이용을 제한하기도 하고, 순수한 자원봉사자 중심의 도서관을 특정한 소수의 활동으로 배척하면서 도서관운영을 방해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특성을 보인다. 종교기관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은 개관시간이 짧고 자원봉사자 중심으로 운영하면서 시민들의 이용이 활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공립 작은 도서관들은 주민자치센터 안에 설치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작은 도서관을 권장하던 시절 많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주민들을 위한 자치 공간 등으로 전환되는 추세이다.
작은 도서관을 실제로 방문해보면 이름만 도서관이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 이런 작은 도서관들에 대해 자치단체에서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사립 작은 도서관 운영자들은 장서와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은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몇 년 운영하면, 장서는 어느 정도 채워지고,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해서도 홍보를 하고 행사를 진행하는 등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은 공간임대료와 사서 지원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 세밀한 조사를 통해 지역사회에서 그 도서관이 얼마나 공공성을 담보해왔는지, 실제 지원이 필요할 만큼 지역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지, 공공기관의 유휴공간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심한 정책이 필요할 때이다.
올해부터 문체부는 작은 도서관을 지원하는 순회사서제도를 확대한다고 한다. 지속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이어지는지 지켜볼 일이다.
전국적으로 공공도서관 수가 늘고, 도서관의 서비스도 점점 다양해짐에 따라 사람들의 발길은 이제 자연스럽게 공공도서관 쪽으로 향해간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지역대표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을 중심으로 하여 도서관 정책의 기본을 세워나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민간·작은 도서관이 보여주었던 책읽기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지자체가 설립한 공공도서관에서도 구현되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지역사회에서 공공성을 담보하며 오랜 기간 운영해온 민간·작은 도서관들에 대해서는 공공으로 포용하는 정책도 적극 고려되었으면 한다. 시민들의 기금을 모아 건립하고, 시민들이 뜻과 마음을 모아 운영해온 공공의 자산이 덧없이 스러지는 것은 결국 사회적 자본의 손실이 아닐까. 우리 사회에 내재한 역동성과 가능성을 보여준 작은 도서관이라는 신화가 헛되이 스러지지 않기를 바란다.
기획회의. 2020.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