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

도서관과 마을공동체

강아래쪽마을 2020. 3. 24. 07:25

신남희(은평 구산동도서관마을 관장)

 

10년 전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짧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올해부터 5년간 매년 천만 원씩 후원하겠습니다.”

평소에도 꾸준히 후원해주시는 분이었지만, 그날 새벽의 약속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도서관을 운영하며 많은 분들을 만났다. 방송에 출연하여 시민들의 후원으로 설립한 민간도서관의 활동을 소개하고 운영의 어려움을 털어놓자마자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와 오십 만원이 든 하얀 봉투를 내밀던 노신사, 라디오방송을 듣고 전화를 걸어 익명으로 후원을 약속한 중년남성 등.

그분들은 물질적인 기부 이상의 힘을 내게 주었다. 뿐인가, 도서관에 일거리가 좀 많다 싶으면 어디선가 나타나 도와주던 시민들의 자원 활동도 큰 힘이 되었다. 그분들의 후원과 자원 활동으로 가끔은 지칠 때에도 힘을 내고 도서관운동을 하는 보람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공공에서 설립한 도서관 역시 그런 시민들의 지지가 바탕이 될 때 든든한 힘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공공도서관이 그토록 강력한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적이 있었던가? 2000년대 초반 기적의 도서관을 지어달라고 전국 곳곳에서 고사리같은 손들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고 방송국에 편지를 쓰던 때가 기억난다. 그 뒤를 이어 도서관을 지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는 줄을 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힘으로 도서관을 직접 건립하는 것과, 내가 사는 동네에 도서관을 지어달라고 구청이나 방송국에 요구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관이 꽉 막힌 채 소통이 되지 않고, 일방통행 행정이 지배적일 때 민은 공동체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냈다. 그 과정은 쉽지 않지만, 공동체에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일을 시민들이 힘을 모아 성취해 나갈 때는 희열과 보람이 함께 한다.

시민의 힘으로 도서관을 만들면 지역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고 애향심이 생기며, 시민들이 도서관의 고객이 아니라 주인이 될 수 있다. 시민이 도서관의 주인이 될 때, 도서관은 마을의 중심이 되고 공동체의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시민들은 도서관에 기부를 하고 자원봉사도 하게 된다. 도서관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준비과정에 도움을 받아 창업에 성공한 사람이 이후 도서관에 거액을 기부하는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시민들의 회원제도서관이 공공도서관 건립의 모태가 되어 도서관 건립운동이 일어나고,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어나간 사례가 미국 공공도서관 역사에는 많다고 한다.

작가 수전 올리언은 그의 소설에서 공공도서관이 미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공공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해 협회가 결성되고, 화재가 난 도서관을 복구하기 위해 기금모금부터 자원봉사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이 힘을 모으는 모습에서 도서관이 지역민들에게 얼마나 지지를 받는지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민간에 의해 만들어진 수많은 회원제도서관들이 있었는데, 그런 도서관들은 왜 공공도서관 건립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지 못했을까? 민의 운동은 제쳐두고 관이 의제를 가져가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해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민은 소외되어 버리고, 관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시민들은 구경꾼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런 일들이 도서관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숱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서관건립과 협치 행정

우리 도서관을 방문한 서울의 모 구청장이 감명을 받아 구청 직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주택을 매입해서 구산동도서관마을과 똑같은 도서관을 만들어 마을사업을 활성화시키라고.

기존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면 창조라고 할 수 없다. 구산동도서관마을 리모델링은 지어진 시기가 197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각각 다른 한옥 5채와 다가구주택 3채를 매입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선택일 뿐, 다른 조건과 상황이었다면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 수 있다.

사실 한옥이나 다가구주택은 도서관 용도로 적합하지 않다. 방이 작고 천정은 낮으며, 여러 채의 건물을 연결하다보니 경사가 가파른 곳이 있어서 책 수레를 끌고 다니기 어렵다. 건물 연결 부분에서 발생한 누수는 아직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방음도 잘 안 된다.

그럼에도 구산동도서관마을은 공공도서관이 마을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건축설계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지혜가 모아져 협치의 건축이 가능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의 독특한 건축형태와 실내구조는 관에서 일방적으로 지어 완공하는 기존 공공건축방식에서는 나오기 힘든 모델이다.

전국 곳곳에서 도서관을 지어달라고 주민들이 청원을 하고 집회도 하였지만, 도서관을 짓기로 결정한 시점부터는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리고, 관 주도의 일방통행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그랬기에 도서관 건립결정과 건축과정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은평구의 열린 행정은 도드라져 보인다.

공공의 사업에 민간참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공공정책의 기획과 집행과정에서 관이 더 효율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민간이 비판만 하는 집단이 아니라 책임 있는 주체로서 의식을 갖고 공공사업에 참여하게 되는 면에서도 그렇다.

시민들이 건립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탓에 구산동도서관마을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는 무척 높다. 우리가 만든 도서관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은평구의 랜드마크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여러 기관과 개인들이 도서관을 방문하여 공동사업을 제안한다. 지역 단체들이 교육을 위한 공간대관이나 공동행사 개최를 요청하고, 동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기획서를 가져와 강좌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사진작가와 화가들은 도서관 내 공간을 빌려 수시로 작품전시회를 연다. 도서관의 다양한 동아리들은 마을공동체지원센터나 독서동아리지원센터 등이 주관하는 공모사업에 참가하여 받은 지원금으로 흥미로운 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모든 도서관들이 구산동도서관마을과 같이 건립될 수는 없지만, 주민참여를 높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이유이다. 주민들이 도서관을 서비스를 제공하는 단순한 행정기관으로 느끼며, 스스로를 소비자 혹은 고객이라고 여기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마을과 함께 하는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도서관 방문 이후 정부부처와 전국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민간 등 많은 기관과 단체가 벤치마킹을 위해 도서관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위탁 운영하는 협동조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정부가 도서관이나 어린이집, 극장, 체육시설 같은 생활 SOC시설 조성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한 터였고, 그런 생활 SOC시설을 지역 협동조합들이 맡아서 운영하면 어떨지 궁리해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서관을 협동조합이 위탁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대안인지는 의문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이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 체육시설이나 극장같이 수익을 거두는 시설과 달리, 도서관은 수익이 거의 발생하지 않고, 공공예산으로만 운영되는 기관이다. 공공도서관은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기관이며, 마을 사람들이 공동체 활동을 위해 실험적으로 운영해서는 안 되는 시설이다. 도서관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마을 사람들의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설립된 곳도 아니다.

도서관은 전문가들이 운영해야 하고, 도서관다운 방식으로 마을과 만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지역전체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 년 전 유명 건축과 교수가 인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주민 참여형 건축의 모범으로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소개하며, 사서가 한명도 없고 자원봉사자들이 전적으로 운영하는 도서관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다. 관장을 포함해 30명에 가까운 사서들이 일하고 있는 도서관을 자원봉사자만으로 운영하는 도서관이라고 하다니! 또 그 방송 프로그램 관련 PD와 작가들 아무도 그것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니! 도서관이 이렇게 허술하게 보였으니, 마을 사람들 누구나 조합원이 될 수 있는 협동조합이 도서관을 운영하는 것도 문제없다고 보았나 보다.

물론 해당 방송내용을 확인한 직후 방송사에 정정 보도를 요청했고, 방송국은 정정하는 내용의 자막을 내보냄으로써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도서관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도서관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정치인과 지식인, 마을활동가 할 것 없이 모두 전문가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식견을 과신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그 문제가 우리 도서관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될 지경이다.

공적 예산을 투입하여 지자체가 건립하고 운영하는 공공도서관은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거나, 지자체 출연 공공재단을 통해 운영해야 한다. 다만,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시민들을 위한 도서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운영에 있어서는 미국처럼 도서관위원회를 설치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다. 미국 도서관은 시에서 직접 운영하고, 지역 유지들로 구성된 도서관위원회가 기금을 모으고, 관장을 선임하는 등 도서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담당한다고 한다. 도서관위원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도서관운영을 지원한다는 점에서 형식적 자문기구의 역할에 그치는 우리나라 도서관 운영위원회와 구별된다.

공공도서관이 마을과 만나는 방식은 더 창의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도서관은 마을공동체를 위해 지금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기획회의. 202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