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서가는 어떻게 채워져야 하는가
「도서관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스런 접근이 가능하도록 한다. 모든 언어로 된 자료, 모든 나라의 모든 형태로 된 자료를 제공한다. 그리고 숙련된 전문 사서로 하여금 이용자를 돕게 하며 문명의 기록물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가르치게 한다. 이런 도서관은 지역과 전국적 협력 체제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 그리고 실물장서를 광범위하게 갖춘 장소와 원격 자원에 대한 편리하고 자유스러운 접근이 보장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도서관학자 마이클 고먼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도서관 장서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지만, 현장에서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장의 고집스러운 소신을 필요로 한다.
십여 년 전 개관도서관의 관장으로 일한 적이 있다. 당시 지역 구립도서관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여서 주민들의 기대가 큰 도서관이었다. 첫 출근을 해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참 아쉬웠다. 도서관 내부구조와 장서 구성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였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작은 꿈 하나를 품게 되었다. 도서관 개관준비 단계부터 참가하여 도서관 내부 공간구조와 서가, 도서선정까지 직접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관장을 미리 채용하여 도서관 개관을 직접 준비하도록 하는 자치단체가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공공도서관 장서구성 기준의 필요성
전국에서 공공도서관들이 해마다 수십 개 건립되고 있지만, 도서관 개관에 따르는 제반과정들이 매뉴얼화되어 있지 않다. 건립될 도서관이 주로 봉사하게 될 지역의 특색과 주민구성, 그에 따른 장서구성의 원칙, 도서관의 주요 운영방침과 직원들의 역할에 대한 좀더 세밀하고 명확한 기준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도서관을 준비하기 전에 자치단체에서 도서관발전종합계획을 수립하거나 문체부에서 신규 건립예정도서관에 컨설팅을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도서관을 건립하고 개관하는 일들이 아직도 개별 자치단체의 역량에 맡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도서관 개관을 준비할 때 상당한 예산을 책정하여 구입하는 도서들의 목록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만드는 것일까? 혹시 지금도 개관도서관들에 도서 도매업자들의 재고도서가 다수 포함된 권장도서목록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도서관 개관 TF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서에게 개관준비 시 도서구입예산과 도서선정 과정에 대해 물어 보았다. 당시 개관도서관 연면적이 1500제곱미터였는데, 도서구입비로 약 3억 정도의 예산을 사용했으며, 2명의 사서가 2개월 정도 준비했다고 한다. 기존 구립도서관의 장서와, 비슷한 시기 개관한 다른 도서관의 장서를 참고로 하여 수서를 하고 서점에 직접 나가 실물도 살펴보면서 선정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서 도매업자들이 목록을 주려고 했으나 거절했으며, DVD자료는 업자들이 건넨 목록을 참고로 했다. 시간이 부족하고 선정도 쉽지 않아서였지만, 그 결과 DVD의 경우 다수의 복본과 활용되지 않는 자료들이 많아 지금도 아쉽다고 한다.
모든 도서관이 동일한 장서를 갖출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공공도서관 장서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기준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도서관협회에서 발간하는 『한국 도서관 기준』이 있긴 하지만 너무 간단하고 포괄적이다.
관련해서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연구논문이나 책자를 찾아보니 부산대 장덕현 교수의 논문 「공공도서관 개관장서 구축방안 연구」 한 편이 검색될 뿐이다. 그마저 직접 해당도서관에 가서 지정된 PC로만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문을 닫은 상태라 그마저 이용이 어렵다. 이럴 수가 있는가. 개관장서가 도서관의 기본장서가 될 터인데 참고할 자료가 이토록 부족하다니.
도서관장서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분야별로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책, 최근 10년 안에 화제가 되었던 책, 각 분야에서 꾸준히 팔리는 책, 최근 인기 있는 책 등을 어떤 기준으로 선별하고 있는가. 새롭고 다양한 책을 많이 갖추기 위해서는 어떤 책들이 많이 읽히고,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근거로 장서를 구입하고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서가 해야 할 일이다.
최적의 장서를 갖추기 위한 도서관의 노력이 중요
나는 도서관에서 수서 담당자만이 아니라 자료실 담당자들도 자료구입과정에 함께 참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그 분야의 출판 흐름, 이용자들의 도서대출 경향을 반영하여 장서를 구입하기 위해서였고, 사서들이 책을 잘 알아야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자신있게 봉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도서관과 관련 분야의 주요도서를 읽게 하고 서평을 제출하도록 했다. 책도 읽고 글쓰기 훈련도 하기 위해서였다.
직원교육시간에 독립책방을 포함하여 서점에 직접 나가 보고, 보고서를 써서 직원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도 가졌다. 서점에서 신간 출판 경향을 살피고, 책 전시 방법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보고 오면 사서들은 책을 전시하는 방법뿐 아니라 주제별 책 전시에도 관심을 갖고 자신있게 일을 추진해나가곤 했다.
그 외에도 사서들이 도서관정책과 외부환경의 변화를 알고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교육기회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사회흐름과 출판 동향을 놓치지 않아야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최적의 정보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본관도서관과 각 분관 사서에게 지역분석을 과제로 내주기도 했다. 봉사대상 지역의 인구구성, 도서관 이용인구가 차지하는 비중, 지역에서 제공되어야 할 정보서비스의 방향 등을 분석해보도록 했다. 대부분 도서관이 분류와 목록을 외부업체에 맡기는 추세였지만, 사서들이 분류목록도 직접 하게 했다. 책을 만져보고 분류목록을 하면서 책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책을 더 잘 알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난 관장이 무서워서인지 몰라도 사서들은 이런 과제들을 군말없이 잘 해내었다. 당시는 힘들었을지라도 그때 경험이 그들에게 좋은 자산이 되었으리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만약 지금이라도 개관을 준비하는 도서관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초부터 도서관을 차근차근 세워보고 싶다. 사서들을 미리 뽑아 사전교육을 철저하게 할 것이다. 책을 써서 살아가는 작가, 좋은 책을 만들고 파는 것을 소명으로 삼는 출판사와 서점에 대해서도 알려줄 것이다. 도서관의 소중한 협력자로서 출판과 출판 산업에 대해 이해하고, 서점과 독자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눈을 갖도록 할 것이다.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으며,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애착을 갖고 진심을 다해 도와주는 사서가 되도록 가르치고 싶다.
그리고 분야별로 개관장서를 구축할 것이다. 각 분야의 명저들과 고전, 현재의 독자들이 즐겨 읽는 책까지 두루 망라하여 장서를 구축한 다음, 책 읽고 싶은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다.
새롭고 다양한 책을 많이 갖추고, 도서관에 가면 읽고 싶은 책이 반드시 있다는 신뢰를 시민에게 심어주는 것은 도서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공기관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지금 어떤 책들이 읽히고 독자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사서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빨리 도서관에 갖출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요즘 도서관들은 인쇄된 책자 형태의 자료와 CD나 DVD같은 비도서자료 외에도 전자자료를 정기적으로 구입하고 있다. CD 대출은 덜 알려져 있고, 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양도 아직 많지 않지만, DVD는 꽤 이용이 많은 편이다. 작품성이 뛰어나지만, 주변에서 구하기 힘든 영화들을 도서관이 DVD 형태로 갖추어 정기상영회를 열고 시민들에게 빌려주는 것은 도서관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이다.
전자자료의 경우 도서관마다 장서구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나 구입방식이 다르다. 코로나사태를 맞아 전자자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용율도 높아졌다. 한때는 전자자료가 인쇄도서자료를 완벽하게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아직은 어느 쪽 자료의 압도적 우위를 예상하기 어렵다. 인쇄매체와 전자매체가 가진 장단점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앞으로도 병행해서 구입하고 제공해야 할 것이다.
도서관의 장서 구입이 신간출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행정처리속도와 관련있다. 시민들이 읽고 싶은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희망도서, 희망도서바로대출, 북페이백 같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제도들도 생겼다. 이런 제도들이 확대되어 오랜기간 실시될 경우 시민들의 새 책에 대한 목마름을 조금 더 빨리 가시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 도서관 장서를 부실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신간구입에 따르는 행정절차를 간소하게 하여 신간을 빠르게 구입한다면, 희망도서바로대출이나 북페이백 같은 제도의 문제점을 발생시키지 않으면서도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원하는 책을 더 빨리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기왕에 실시해온 희망도서제의 경우에도 개인당 신청권수를 더 줄이고, 전체 도서구입에서 비율을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한정된 자원으로 더 많은 시민들에게 필요한 책을 골고루 갖추기 위해서이다.
도서관의 장서구성에는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하고, 이 원칙은 어떤 경우에도 굳게 지켜져야 한다.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가 정신을 지니고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로 원칙을 고수해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굳건히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다.
책이 없는 도서관을 버젓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책없는 도서관은 더이상 도서관이 아니다. 그것은 곧 도서관의 소멸이다. 인류가 축적해온 지적 자원을 현재 인류에게 전해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소명으로 하는 것이 도서관이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기획회의 20.08.05. 신남희. 서초구 대표도서관장 겸 반포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