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누리는 행복
얼마 전 '제인 오스틴 북클럽'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이와 성격, 생활배경이 전혀 다른 남녀 주인공 6명이 한 달에 한 번씩 제인 오스틴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에 모인다. 여섯 명의 남녀는 제인 오스틴의 책 한 권씩을 맡아 모임을 진행하기로 하는데, 모임 진행자가 집과 음식을 제공하고 토론을 진행하는 모습이 퍽 자연스럽다.
미국의 어떤 공공도서관은 매달 작은 파티를 열어 시·소설·책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대부분 지역주민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나 책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산이나 부산에서 한 도시 전체가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한 도시 한 책읽기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도서관에서 토론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프로그램은 다른 문화센터와 큰 차이가 없는 일방적인 백화점식 강좌가 주를 이룬다. 제인 오스틴 북클럽처럼 구체적인 주제를 갖고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삶의 변화를 겪는 식의 도서관문화는 아직 보기 힘든 것 같다.
나는 이십 여 년 가까이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실행해보았다. 10여 년 전 달서구로 이전해 마을도서관으로 자리 잡은 후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기행·독서교실·영화상영·책문화축제 등을 진행했다.
이 경우 어른들은 아이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서 도서관에 온다는 식이었고, 아이 책만 잔뜩 빌려갈 뿐 어른이 읽을 책을 빌려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최근에는 이런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어 어른들이 자신이 읽기 위한 책을 빌려가는 경우가 조금씩 늘어난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 도서관에서도 어른들이 책 한 권을 읽고 모여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곧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서관에서는 역시 책과 관련된 모임이 활발하게 열리면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도서관의 활성화는 도서관 운영자의 열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도서관에 대한 지원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될 때 도서관은 장기 계획을 세우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실례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도서관 운영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에 사로잡혔었다. 죽을 힘을 다해 민간이 도서관을 운영해도 국가나 지방정부는 뒷짐을 지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민간의 노력에 대해 소극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다행히 몇 년 전부터 도서관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커지면서 지방자치단체가 도서관 설립에 앞장서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2003년 어린이도서관 설립 붐을 주도한 기적의 도서관이 제일 먼저 들어선 전남 순천의 경우, 도서관이 도시민 전체의 삶을 바꾸어나가고 있는 사례로 꼽힐 만하다.
순천시는 기적의 도서관뿐 아니라 동네마다 작은 도서관을 만들어 도서관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순천 뿐 아니라 여러 도시에 많은 수의 도서관이 설립되었고, 변화가 더딘 우리 지역에도 몇 곳의 도서관이 설립되었거나 계획 중이다.
민간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도서관의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서도 조금은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도서관의 절대 수는 여전히 적고, 예산도 빈약하며 도서관 운영의 핵심인 사서 인력충원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도서관계에는 도서관 발전의 계기로 크게 기대를 모은 일이 있었다. 개정된 도서관법에 의해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가 대통령소속으로 설치된 것이다.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는 도서관정책에 관한 주요사항을 수립·심의·조정할 예정이었다.
도서관인들은 이제야말로 선진국형 도서관으로 발전할 기회가 왔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새 정부 인수위원회가 폐지할 각종 위원회 중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도 포함됐다고 한다. 구성된 후 제대로 활동도 해보기 전에 폐지의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이제 겨우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참에 발판을 빼앗기고 주저앉혀지는 격이다. 다시 그런 기회를 마련하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할까. 지식정보강국으로 발전하겠다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도서관발전을 도모하지 않는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걸까.
마을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행복해하며 삶의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기쁨을 계속 누리고 싶다. 우리 도서관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내 어렸을 적 상상력의 원천이었던 우리 동네 마을도서관’을 떠올리는 보람을 누리고 싶다.
신남희(새벗도서관 관장)
- 매일신문 3040칼럼 (2008.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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