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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즐거운 책읽기

도시 노마드 구보 씨의 식민 수도 경성 주유기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 /조이담. 박태원 /바람구두

 
 
 
도시의 건물과 거리 속에 깃든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로 되살려낸다면 우리의 도시는 좀 더 정겨운 곳이 되지 않을까? 고골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넵스키 거리를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한 것처럼 말이다.

1967년생이며, 건축도시계획공부하고 도시문화와 공간이론에 천착한 조이담의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를 읽었다. 이 책은 도시공간과 문화에 대한 고민을 독특하게 풀어낸 조이담의 ‘경성 만보객 신 박태원 전’과, 일본 식민지 시절 경성을 배경으로 소설가 구보 씨의 하루를 그린 박태원의 소설 ‘구보씨의 일일’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 형식으로 구성된 ‘경성 만보객 신 박태원 전’은 소년 박태원을 둘러싼 사람들과 당시 경성의 풍경과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10세의 박태원이 보통학교에 입학하던 해는 마침 1919년 기미년이었다. 기미년의 만세운동은 3월 1일 하루로 그치지 않고 수개월 이어졌다. 경성 거리는 눈에 뻣뻣이 힘을 준 일본 경찰관들과 시위주동자 색출에 나선 무장 헌병들로 아직도 어수선하다. 입학식 날 어머니, 형과 함께 종로네거리를 건너 공평동 길에서 만난 살풍경한 경성의 모습은 어린 태원에게 오래 잊히지 않을 기억으로 남는다.

 

태원의 숙부 박용남은 경성의전을 나와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있다가 조선인 최초 개업의가 된 인물로, 형

박용환의 약방과 무릎을 나란히 한 곳에 병원을 개업했다. 의사인 동생이 처방전을 쓰면 형의 약방에서 약을 제조하는 일종의 의약분업 관계였던 셈이다. 이야기 사이사이에 선교사 알렌이 개화파들에게 칼을 맞은 명성황후 동생을 치료해준 것을 인연으로, 개혁에 실패해 척살당한 홍영식 대감집터가 제중원으로 된 사연, 제중원 터와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운 박규수 대감집터가 합쳐져 경성여고보로 바뀐 사연들이 나온다.

 

실패한 갑신정변에 대한 아쉬움, 요릿집 태화정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연하게 잡혀가는 민족지도자들, 탑골에서 따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준비한 젊은 학생들 같은 당시의 시대 풍경도 재현된다. 궁중 요리사였던 안순환이 차린 경성 시내 최고의 요릿집 태화관과 1923년 종로네거리에서 안국동 별궁 앞까지 부설된 조선 최초의 전차, 조선총독부가 홍례문과 주변 전각을 헐고 들어오면서 광화문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사연들도 이어진다. 태원의 숙부와 고모가 아끼는 젊은 한위건과 이덕요의 애달픈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기미년 만세운동 이후 일본 유학을 갔다가 돌아왔으나,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다시 상하이로 떠나는 청년 한위건과 여의사 이덕요, 그들의 유일한 혈육이 태원의 숙부에게 입양되고, 그가 자라 여의사 박애스더가 되리라는 가슴 시린 후일담까지. 그 와중에 태원은 춘원 이광수를 만나 등단하고, 신문사에 근무하던 소설가 이태준에게 연재소설을 써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소설가 구보씨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구보씨가 광교 근처 청계천변 다옥정 7번지 집에서 출발해 종로네거리와 동대문, 남대문, 경성역, 광화문통 등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풍경을 담고 있다. 거리와 건축, 전차, 간판, 카페, 술이 나오고, 철학과 문학과 시와 음악이 흐른다. 시인 김기림과 소설가 이상도 태원의 벗으로 등장한다.

당시의 건축물과 거리 풍경이 담긴 사진들과 거리와 건물에 깃든 온갖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근대도시 경성의 스토리텔링인 셈이다.

 

1970년 초 최인훈은 동명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통해 불행한 시대를 견디는 한 지식인의 초상을 그렸다. 만 하루 동안 서울거리를 배회하는 박태원의 구보씨와,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될 길을 찾지 못한 채 거리를 헤매며 시대를 괴로워하는 최인훈의 구보씨를 비교하며 읽어보는 것도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할 듯하다.

(2012.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