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야기
마을의 풍경에 어울리고 삶에 녹아드는 도서관 건축
신남희(은평구립 구산동도서관마을 관장)
밤이면 골목으로 난 수많은 창마다 따스한 불빛이 비치는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아늑한 책들의 집이고,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의 숨결이 스민 마을운동의 상징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먼저인 것은 건축에서이다. 여러 채의 집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구산동도서관마을은 공간을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를 준다.
처음 도서관에 들어서면 정면 데스크에 있는 사서들이 따뜻하게 맞아준다. 안쪽으로 들어서면 5층까지 트인 높은 천정에 수많은 창들이 있는 벽과, 옛날 건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발코니들이 보인다. 온통 하얀 벽에는 신영복 선생의 ‘三讀(책은 세 번 읽어야 한다)’는 글이 선생의 필체로 쓰여 있고, 또 한쪽 벽에는 도서관인들의 영원한 스승 랑가나단의 ‘도서관학 5법칙’이 쓰여 있다.
한켠에는 빨간 공중전화부스가 보이고, 또 그 옆에는 작은 차양이 있는 공간이 보이는데, 독립출판물을 따로 모아 놓은 코너이다. 공간을 천천히 돌아보면, 다가구주택의 옥상이었던 듯싶은 야외공간도 여러 개 있고, 공간마다 꽃이며 채소들이 정성스럽게 심어져 있다.
새롭되 낯설지 않고, 익숙한 느낌이면서 놀라움을 주는 곳. 그곳이 바로 구산동도서관마을이다. 도서관 설립에 얽힌 이야기며 남다른 운영방식에 대해 듣고 나면 도서관은 더 특별하게 보인다. 건축에서부터 이런 놀라움과 새로움을 주는 도서관, 멋지지 않은가?
내가 어렸을 때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했던 시립도서관은 낡은 붉은색 벽돌건물이었다. 건물 안은 어둡고 먼지 냄새가 났으며, 서랍을 뒤져 빌리고 싶은 책의 청구기호를 적어 시외버스정류장 개찰구 같은 구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사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빌린 책 두어 권 이외에는 다른 책들을 구경할 수 없었다. 군사독재의 서슬퍼런 군홧발이 거둬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도서관에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몇 년 전 근무했던 구립도서관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 무렵 유행했던 건축양식이었는지 건물의 삼면이 유리로 되어 있고, 내부벽도 유리가 많아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다. 실내는 전체가 흰 대리석벽과 바닥으로 되어 있어 차분하게 책을 읽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름에는 유난히 덥고, 겨울에는 추워서 냉난방비도 많이 들었던 그 도서관은 무엇보다 공간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과 불편함을 주기 쉬웠다.
그 무렵부터였을까. 도서관이 자유롭고 편안하며,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창의적 공간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의문은 도서관에 들어섰을 때 놀라움과 충격을 느끼고, 자주 오고 싶은 매력을 주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마을의 풍경과 어울리고 마을 사람들의 삶에 녹아드는 건축
책이 주는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을 예고해주는 공간의 충격을 도서관이 줄 수는 없을까? 공공예산으로 지어지는 공공도서관은 마땅히 건축에서부터 도서관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도서관이 담고 있는 내용물이 혁신적일진대, 그것을 담는 그릇은 마땅히 혁신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기에, 그곳은 마땅히 가장 멋지고 세련된 공간이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건축이어야 한다.
2003년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하 책사회)이 MBC 느낌표와 진행한 ‘기적의도서관’ 프로젝트 때 도서관을 직접 운영해온 민간전문가 자격으로 준비과정에 참가했다. 당시 건축을 담당한 정기용, 조건영 두 분 건축가를 뵙고, 그분들이 도서관을 설계하는 과정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며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눈이 뜨이는 경험을 했다.
정기용 선생은 도서관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이고, 제도적 공간이 아니라 아이들이 즐겁게 찾아오는 공간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책을 꼭 지식으로만 습득하지 않고 상상력의 날개를 펴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꿈꾸는 공간, 가고 싶은 공간, 머무르고 싶은 공간, 매일매일 새롭게 발견되는 공간, 한눈에 쉽게 다 포착되지 않는 공간, 그런 것들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공간이며, 초등학교 건축이 일제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기 힘든 상황에서 어린이 도서관이 밀린 숙제를 하듯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맛보게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적의 도서관이 가져온 놀라운 사회적 환기,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던진 울림은 책읽기라는 것, 사회가 아이들의 책읽기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 도서관이 책읽기와 문화적 활동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준 울림의 가장 근본적인 계기는 기적의도서관이 준 건축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적의 도서관은 그곳을 이용하는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을 것이고, 도서관에 대한 긍정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어린이도서관 건축과 공간구조에서 커다란 혁신을 가져왔다.
요즘 새롭게 건립되는 공공도서관이 크게 늘면서, 얼마나 많은 예산을 들여서 멋진 건물을 지었는지, 새롭고 화려한 공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는 도서관들이 많아졌다. 규모가 크고 시설이 좋은 도서관들이 곳곳에 건립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 공간을 계획하고 건축하는 전 과정에 건축가와 공무원, 도서관 전문가가 참가해서 고심 끝에 지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공공의 건축이 진정으로 사랑받는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마을의 풍경에 어울리고, 마을 사람들의 삶에 녹아드는 건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책만이 아닐 것이다. 일찍이 가보지 못한 멋진 공간에서 책을 읽고 공연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는 건 시민들이 다른 공공건축물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가장 공공적인 경험이자, 사회가 줄 수 있는 복지일 것이다. 최근 어떤 언론사에서 ‘공간복지’라는 개념을 만들어 공공건축물로 복지를 실현한 우수 지방자치단체에게 상을 주었는데, 그 첫 번째 수상자가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지은 은평구청이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특히 시골이나 도시변두리에서 변변한 문화생활을 누리기 어려운 대부분의 어린이나 주민들이 도서관에서 겪는 문화적 경험들은 격차를 극복하고 문화평등을 이룰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인 것이다. 정보와 문화의 평등을 도서관만큼 효율적으로 실현해나갈 수 있는 기관이 어디 있겠는가?
이상적인 공공건축을 구현하는 행정의 혁신과 도서관문화의 변화
정기용 선생은 건축은 필요에 의해서 생산된다며, 누가 그 필요성을 제안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사적인 건축주들은 개별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건축을 건축가에게 주문하기에,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제안하는 공공의 건축주가 있어야 하며, 공공의 건축주가 누구인가에 따라 건축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기적의도서관이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놀라움과 기쁨을 선사하며, 탐색하고 싶고 머물고 싶은 성공적인 건축물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책사회’라는 성공적인 ‘공공의 건축주’ 덕분으로 돌린다. 물론 책사회는 홀로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최상의 건축가와 함께 여러 전문가와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려는 진정어린 노력을 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성공적인 건축물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인지 건축가 최재원에게 질문하였을 때 그도 유사한 대답을 했다.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건축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고.
그들 중에는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하면서, 도서관 공간을 구석구석 체험해본 이도 있고, 아이들과 함께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며 불편함을 느끼고, 이런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공연예술을 진행하면서 일상적인 문화예술공간으로서 도서관의 가능성을 경험해본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수많은 무명의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하는 말은 공공건축이 실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지어져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정기용은 건축가 개인의 판타지와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모든 사람이 협력하여 사회적 상상력을 도출하는 건축, 그것이 거버넌스 건축생산 방식이다, 그래야만 경제사회로부터 우리가 가야만 하는 문화사회로의 이행이 촉진될 것이라고 한다.
건축가 신승수는 도서관 건축에 있어서 개별적인 도서관의 웅장함이나 수려한 미관에 앞서 도시의 공간구조와 어떻게 연계되는지, 다양하고 복합적인 사용을 가능하게 하면서 어떻게 공공성을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질문이 선행하지 않는다면 나 홀로 아파트와 같이 우리 일상에서 동떨어진 도서관의 문제점을 바로잡을 수 없고, 닫힌 공간에서 주입식 공부를 하는 현재의 폐쇄적이고 낙후된 공간의 질을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을 방문한 분들이 ‘이 도서관을 내가 사는 동네에 옮겨놓고 싶다’, ‘도서관 근처로 이사오고 싶다’고 하는 말들은 단순히 물리적 실체로서 내가 사는 동네에도 도서관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동네에 어울리고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마을도서관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그런 도서관들이 늘어난다면 우리도 진정한 문화도시 문화국가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 기획회의 2020.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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