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희(은평 구산동도서관마을 관장)
동네서점도 살리고 시민도 편리한 정책이라고? 정말?
몇 년 전 경기도의 한 지방자치단체가 희망도서바로대출제를 실시하여 행정 모범 사례로 소개되면서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고 있다. 이 제도는 지역 주민이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검색하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희망도서바로대출로 신청할 수 있는 책일 경우, 가까운 지정 서점에서 빌려 읽고 서점에 반납하는 제도이다. 서점은 반납된 책을 도서관으로 납품하고, 비용은 도서관의 도서구입 예산에서 지불된다. 이 제도를 시행하는 서울시 모 자치구는 전체 도서구입비 중 절반이던 희망도서바로대출구입비를 올해 더 늘리라고 지시했다 한다. 비슷한 제도로 서울시 또 다른 자치구는 상당한 예산을 들여 주민이 서점에서 책을 사서 읽고, 도서관에 반납하면 책값을 돌려주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 자치구 도서관은 구에서 지원하는 도서구입비 전액을 희망도서구입비로 사용해야 한다.
은평구에서도 몇 년 전 이 제도에 관심을 갖고 구립도서관 관장들을 모아 간담회를 연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이 제도에 반대했는데, 첫째, 연간 10억 원 이상을 투입하는 경기도 해당 지자체와 달리 은평구의 개별 도서관 연간 도서구입비는 몇 천 만원에 불과한 실정에서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오히려 이용자의 불만만 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용하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예산이 조기에 소진되면 아쉬운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질 것이니까. 둘째, 은평구립도서관들은 이미 동네서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해있는 동네서점협동조합에서 전액 도서구입을 하고 있는데, 굳이 이런 제도까지 도입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셋째, 이렇게 들어온 책들로 서가가 채워지게 되면, 장서의 질 하락과 특정 주제로의 편향이 심해질 수 있다. 넷째, 동참하는 지역 서점들에 별도의 시스템을 설치해주어야 하고, 참여 서점이 많을수록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든다. 다섯째, 관련 예산이 크지 않을 경우 정책효과가 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은평구는 이런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실시하지 않기로 했다.
도서관에서 가장 중요한 3요소를 책, 사람, 건물이라고 한다. 책은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는 장서개발정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도서를 구입하여 잘 관리하고, 시민들에게 편리하게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사서들은 최선의 장서개발을 위해 공부하고, 자료도 찾으며 부단히 노력한다.
도서관 장서는 한 사회 지식문화의 척도이며, 공공예산으로 구입하여 한번 서가에 비치되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공의 자산이 된다. 정보에 빠르고 시간 여유가 있는 일부 시민들이 희망도서바로대출로 선택한 책들이 공공도서관 장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면, 장서의 질을 담보하기 어려워질 것이 뻔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독서경향은 다품종소량이기보다 소품종다량에 가까워서, 광고나 언론에 노출된 특정한 책들을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찾는 경향이 있다. 도서관에서 많이 대출되는 책들을 보면, 웹툰만화, 가벼운 에세이류, 로맨스 소설,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 같은 책들이 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인문서들이 간간이 끼여 있는 형국이다.
이미 동네서점이 거의 문을 닫고, 그나마 규모가 큰 몇몇 서점만이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 제도가 참고서 판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네 영세서점들을 활성화하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연세가 많은 분들이 평생 해오던 업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은데, 그분들이 이런 제도에 참여해서 어느 정도 영업이익을 볼 수 있을까? 동네서점에 대한 관심과 약간의 지원책에 힘입어 새로 문을 연 서점이라면, 이 제도에 편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은평구도 도서관 납품에 참여하는 서점은 지역 서점협동조합에 가입한 오래된 서점밖에 없고, 새로 생긴 서점이 조합에 가입하기에는 조합비 부담 등 진입장벽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몇 개의 서점이 이 제도로 활성화될 수 있을지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려운 여건에도 소신을 갖고 좋은 책을 펴내는 출판사들은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상업소설이나 유행에 편승한 얄팍한 자기계발서와 처세술 책들보다, 시대 현실과 공동체의 과제를 다루는 묵직한 책들이 더 많이 팔릴 수 있을까? 독서율의 가파른 하락 속에 점점 심해지는 인문도서의 만성 불황 현상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시민들의 일상 속에 도서관문화가 굳건히 자리 잡지도 못했는데, 지자체가 서점 살리기에 골몰하는 것이 자칫 도서관을 위축시키지 않을까? 막대한 공공자원을 들여 지자체가 설립하고 운영하는 공공도서관을 서점 살리기 정책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시민들이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을 빌려서 읽고 반납할 수 있다면 굳이 도서관에 오려고 할까? 서점이 어려운 것은 독자가 줄어드는 것과 함께, 인터넷서점 이용이 확산된 시대적 흐름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지자체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지역 독서문화를 활성화하고 책 읽는 시민을 늘리기 위한 장기 계획을 세워 끈질기게 추진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에서도 더 빠르게 신간을 독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도서 구입과 정리에 따른 절차를 간편하게 하려 애쓰고 있다. 원하는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왔다가 또 다른 책을 만날 수도 있고, 마음이 끌리는 강좌나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오면 참여할 수도 있다. 동아리나 인문학 강좌, 커뮤니티센터 등 도서관의 확장된 기능과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도서관 장서 구입의 주체는 사서여야
희망도서바로대출제가 생기기 이전에 ‘희망도서제’가 생겼는데, 도서관에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바로 신청하는 제도이다. 희망도서바로대출제와 차이는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곳이 도서관이라는 점이다. 현재 공공도서관 대부분이 실시하고 있고, 도서관의 연간 도서구입비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청자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먼저 빌려 읽을 수 있고, 도서관에서는 미처 챙기지 못한 신간도서를 빠르게 구입할 수 있어서 분명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문제는 희망도서로 신청되는 책의 상당수가 재테크, 처세 등 일시적인 유행으로 끝나는 책이 많다는 점이다. 희망도서로 구입된 책들이 장서로 차곡차곡 쌓인 결과, 도서관 서가는 비슷비슷한 주제의 책들로 넘치게 되고, 주제의 다양성이나 내용의 깊이를 기대하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일부 이용자들은 특정한 정치·종교·상업적 목적으로 여러 도서관에 같은 책을 신청하기도 한다. 그 결과 왜곡된 역사관과 편향된 정치 주장을 담은 책이나, 유사사이비 종교를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책들이 공공도서관 서가에 버젓이 자리 잡는 일을 막기 어려워진다.
시민의 세금으로 만든 도서관에 시민이 희망하는 도서를 구입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한정된 도서구입예산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애쓰는 사서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수서 담당자는 자신이 신청한 책을 왜 구입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민원이 두려워, 희망도서 선별과정을 어려워한다. 자신이 쓴 책이나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의 책을 여러 도서관에 계속 신청해도 현실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다.
도서관의 근간을 흔드는 이런 흐름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전처럼 책이 귀한 시절도 아니니, 공공도서관 장서는 시민들이 원하는 책을 자유롭게 구입해주고, 시민들이 이용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폐기해버리면 되는 시대로 변화하는 흐름으로 보아야 할까? 공공도서관 장서를 이렇게 소홀히 취급해도 되는 것일까? 사서들이 구축해온 공공도서관 장서가 그렇게 가치 없는 것이었던가?
만약 공공도서관 장서의 질이 미흡하다면, 사서들을 교육하여 더 좋은 장서를 체계적으로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도서관 장서가 더 의미있어지는 것이 아닐까? 결국 희망도서제나 희망도서바로대출제를 이용하는 것은 소수의 관심있는 시민들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무척 좋은 제도일 수 있지만, 균형잡힌 장서구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서들의 입장에서 이런 제도가 확산되는 것은 사서의 사명을 내려놓으라는 것과 같다. 혹자는 사서들이 좋은 책을 구입할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고 불신 섞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사서들이 부족하다면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하면 된다. 그것이 공적 자원으로 설립된 도서관이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일이다.
제대로 된 도서관을 이용해본 경험이 없어서 도서관을 잘 모르는 정치인들이 선심성 정책으로 도서관 장서를 거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좋은 책을 선별하여 구입하고, 독자들에게 잘 닿을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은 사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책을 늘리는 것은 좋은 책을 늘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서선정기능이 바르게 작용해야 한다. 도서관 활동에 보다 전문적인 감별능력이 작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도서에 관련된 전문적 식별능력의 공급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책을 산다면 책을 사는 연구를 하는 데에 돈을 들여야 한다. 책은 도서관 사서들의 손으로 모아져야 한다. 사서들의 손으로, 사서들이 주체가 되어 현재와 미래의 이용자를 위한 장서 수집을 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기존의 도서관 조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희망도서바로대출제 같은 정책은 어렵사리 싹트고 있는 도서관문화를 왜곡시킬 수 있다. 도서관이 돈이 되지 않는 좋은 책의 안정적인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은 어려운 여건에서 출판의 소명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뜻있는 출판사들의 손을 맞잡는 일일 것이다. 일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도서관 장서를 맞바꾸는 모험을 하기보다는, 책 읽는 문화를 확산하고 좋은 책 읽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지식문화를 수호하려는 정치가들의 소신과 양식을 기대한다.
기획회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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