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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시민이 세운 공동체 도서관

구룡포에 가본적이 있는가. 대구 사람들은 바다가 보고 싶으면 구룡포에 간다. 구룡포는 대게와 과메기로 유명하다. 오징어도 많이 잡혀서 구룡포항에는 낮에는 알전등을 매단 오징어잡이배들이 정박해 있고, 밤이면 그 배들이 대낮같이 불을 켜고 바다에 떠있다. 굽이굽이 아름다운 해변을 낀 구룡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수산자원을 약탈해가던 노다지 항구이기도 했다. 일제시대에는 읍내 가운데에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구역도 있었다. 언젠가 구룡포에 갔다가 일본식 가옥들을 일부 보수하여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기모노를 대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근대문화역사거리라고 그럴듯하게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일제에 수산자원을 속수무책으로 약탈당했던 구룡포의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일본인들이 구룡포를 그렇게 좋아하고 많이 찾는다 한다. 이런 역사의식없는 행정과 별개로, 구룡포 사람들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진짜 구룡포의 명소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바로 구룡포읍내 한가운데 자리한 구룡포읍민도서관이다. 마당이 있는 2층짜리 작은 건물이지만, 구룡포항 바로 옆이라 위치가 좋다. 그런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도 반가웠지만, 관에서 운영하는 공공도서관은 아닌 것 같아 유심히 살펴보았다.

당시 나는 정부·지자체와 무관하게 민간도서관을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었다. 특정기업이나 재단에서 지원받는 것도 아닌지라, 민간도서관을 계속 운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무렵 대구시 도서관담당 공무원의 권유로 새벗을 사립공공도서관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1999년이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자격기준을 맞추어 사립공공도서관으로 등록했어도, 뚜렷한 지원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전국에 사립공공도서관 현황과 실태를 조사해보기로 했다. 조사결과는 한국도서관협회 이용훈 사무총장(당시는 기획부장)의 권유로 2002년 대구에서 열린 전국도서관대회에서 발표하기로 했다.

발표자료에 구룡포읍민도서관을 넣고 싶어서 수소문 끝에 도서관 운영위원장과 연락이 닿아 설립배경과 운영상황에 대해 듣게 되었다. 구룡포 읍민들이 직접 도서관을 지어 스스로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때 처음 들었다. 포항시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없이, 전문사서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주민들의 힘으로 도서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을 처음 구상한 뒤 뜻있는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건물을 직접 짓고, 도서관을 정식으로 개관한 것은 1994년이었다. 그후 도서관은 마을 사람들이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여 직접 운영해왔다. 구룡포읍민도서관 운영위원이 되는 것은 구룡포에서 무척 명예로운 일이었지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회비를 내어도 받아주지 않았다. 바닷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포항시내에 직장을 갖고 있거나, 배를 가진 선주, 혹은 읍내에서 가게를 하거나 간에 모두 한 마을 주민이라는 동향의식을 갖고 있었다. 도서관에 다니던 아이들이 자라서 또 운영위원이 되는 세대교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층은 자료실, 2층은 강당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이었지만, 주민들의 힘으로 만든 도서관이었기에 자부심과 애착이 컸다.

2006년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이 작은도서관 지원사업을 펼칠 때 안찬수 사무처장에게 이런 도서관이 있다고 알려 주었더니, 고맙게도 바로 후원기업을 연결하여 공간 리모델링을 지원해주었다. 덕분에 도서관은 새롭게 단장하여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2015년 무렵 구룡포읍민도서관 운영위원 이동희씨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구룡포 토박이로 포항시내에 있는 직장에 다니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운영위원이었다. 동희씨는 모처럼 운영위원 워크샵을 여니, 대구 새벗도서관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새로 지어진 구룡포청소년수련관 강당이 강연장이었다. 강연장에는 2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건장한 바닷가마을 남성 30여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역시 마을사람으로 사서자격증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도서관에서 일해온 사서 두명은 밝고 활기찬 표정으로 행사장을 오가고 있었다. 보수는 많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일하며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는 등 사서들도 도서관을 통해 성장했다고 자랑했다. 그날 참가한 구룡포 사람들의 표정에서 읍민도서관에 대한 그들의 자랑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내 강의가 끝난뒤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읍민도서관 발전에 대해 토론하였을 것이다. 그날 나에게 마른 오징어 20마리를 선물해주어 새벗도서관 자원활동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오랜만에 이동희씨에게 전화해 읍민도서관의 근황을 물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동희씨는 읍민도서관에 대한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해양수산부와 모종의 프로젝트를 협의중이며, 몇 년뒤면 읍민도서관이 멋진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 같다고 한다. 여전히 포항시는 관심이 없어 지속가능한 운영구조를 만드는 것이 고민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작은도서관, 공동체로 향한 마중물

서초구에는 주민자치센터마다 작은도서관들이 있다. 서초1동 작은도서관 같은 공립작은도서관은 15개이고, 대부분 아파트 공동시설로 되어 있는 LH서초3단지 행복도서관 같은 사립작은도서관은 27개이다. 이 도서관들은 모두 자원봉사로 운영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구입하여 정리하고, 주민들에게 빌려주며 동아리활동도 한다. 자율적으로 도서관을 운영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아파트 안 작은도서관도 아파트 주민 커뮤니티 공간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사람들이 모여 관계가 만들어지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 마을공동체 활동이라면, 서초구는 작은도서관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마을 곳곳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도서관에 대한 관심과 노력은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며, 이런 애착이야말로 공동체의 소중한 자산이다. 아파트에 있는 여러 편의시설 중에서도 작은도서관은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과 어린이, 노인들이 책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만나 어울리는 공간이라 더 의미가 있다.

경북 칠곡에 해봄도서관이라는 이름의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 분이 있다. 예순을 훌쩍 넘긴 그는 어느해 큰병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 문득 , 이러다 인생이 끝나고 말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후 자기 집 마당 한켠에 컨테이너 도서관을 만들었다. 공장과 상가, 주택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대도시 근교 삭막한 동네에서 그는 아이들을 모아 책과 함께 여러 해째 놀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아이들과 3.1운동에 대한 책을 읽고 만세놀이를 하고, 봄에는 아이들과 봄에 대한 책을 읽고 진달래화전을 부쳐먹는다.

전국에 작은도서관의 수가 6,000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 도서관들이 직원없이 자원봉사자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도서관마다 동아리가 몇 개씩은 있다고 보면, 작은도서관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작은도서관이 갖고 있는 동네사랑방 역할은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개인의 고립과 소외, 사람들 사이의 불신과 갈등을 해결하는 좋은 열쇠가 될 수 있다. 동네에 시설좋은 커뮤니티센터를 만들어 놓아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아 문을 닫는 경우도 있는데, 작은도서관에는 누구나 쉽게 와서 책을 읽고 이웃과 만날 수 있다.

 

작은도서관을 품고 더 커지는 공공도서관

현재 우리나라에는 도서관법과 별개로 작은도서관진흥법이 있다. 똑같이 공중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도서관인데,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을 별도의 법으로 관리할 이유가 없다. 자치구가 설립하여 운영하는 공립작은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의 분관으로 관리하면 되고, 민간이 설립하여 운영하는 사립작은도서관은 지역공공도서관에서 필요한 부분을 지원하되 자율적으로 운영되도록 하면 된다. 다만 운영에 있어서는 작은도서관들이 공공도서관의 틀에 너무 갇히지 않았으면 한다. 소장책의 권수나 분류·목록, 대출횟수 같은 정량적 지표에 구애받지 않고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운영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틀에 갇히면 상상력이 위축되고 죽어버린다. 작은도서관의 생명력이 사그라들지 않고 자유롭게 춤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작은도서관은 도서관을 운영할 전문사서 지원을 가장 원한다. 올해 정부와 서울시는 예산을 크게 늘려 순회사서들이 작은도서관을 돌며 도서정리 등 필요한 지원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지원은 앞으로도 계속되면 좋겠다. 사서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작은도서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면, 질좋은 공공일자리가 늘어나고 작은도서관이 더 활성화될 것이다. 마을에 작은 공동체도 더 많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마을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많은 예산을 지원하지만, 중복참여와 형식적인 활동으로 끝나 버리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보았다. 작은도서관에 사서를 지원하면 아마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계에는 작은도서관이 공공도서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터부시하는 경향이 일부 있다. 공공도서관 체계를 바로 세워 기본부터 제대로 해나가기보다는 손쉽게 작은도서관 개수를 늘려 임무를 다한 것처럼 여기는 정치인들 탓도 있다. 가뜩이나 인력과 자원이 부족한데 작은도서관에 관심과 지원이 집중되면 공공도서관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알고는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작은도서관이 갖고 있는 역동적 에너지가 공공도서관에 부족한 것이 아닌가, 변화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소극적 태도가 공공도서관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헌신하며 작은도서관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열정과 에너지를 폄훼하는 것은 또다른 주류의 오만과 편견일 수 있다.

작은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해온 사람들의 열정과 힘이 공공도서관에 더해진다면, 우리 도서관은 더 커지고 풍성해질 것이라 믿는다. 도서관이 꼭 필요한 곳에 작은도서관을 만들어 묵묵히 운영하는 사람들의 열정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작은도서관을 품고 더 커지는 공공도서관, 거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기회회의 2020.7.20. 신남희. 서초구 대표도서관장 겸 반포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