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초등학교 급식조리사이다. 갑자기 남편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A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하지만 남편을 잃은 뒤 그에게는 장애가 있는 아들과 딸 하나를 키울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고스란히 지워졌다. 다행스럽게도 학교 급식조리사로 들어가게 된 A씨는 힘든 삶 틈틈이 책을 읽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내가 A씨를 만난 것도 도서관에서 독서모임을 새로 만들면서였다. 집이 상당히 먼데도 개의치 않고 A씨는 2주에 한번씩 꼬박꼬박 독서모임에 참가했다. A씨에게 책을 즐겨 읽게 된 계기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아이를 보내던 어린이집 원장이었던 목사님을 통해 책읽기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학부모들에게 책읽기를 권하고, 책을 소재로 이야기도 함께 나누는 등 책읽기의 즐거움을 널리 알리는 분이었다. 그렇게 책에 재미를 들인 후 이제는 두 곳의 도서관에서 독서모임에 참가하고 있으며,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A씨가 책을 읽고 독서모임에서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은 그의 삶에서 얼마나 큰 축복인가.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책읽기를 통해 팍팍한 일상을 견디며 희망이 깃든 미래를 꿈꾸게 할 방법은 없을까. 독서모임을 만들고 운영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춘 도서관에서 그 일을 더 잘할 수는 없을까.
독서모임에 얽힌 추억
중학생 때 시립도서관에서 열린 방학 독서교실에 참가한 적이 있다. 당시 도서관의 공문을 받은 학교에서 학생을 추천해주어 참가하는 형태였는데, 방학 중 열흘정도 일정으로 도서관에 다녔다. 남자 선생님(아마도 사서였을 것이다) 한 분이 담임을 맡았고, 우리들은 종일 책상앞에 앉아 정해진 책을 읽었다. 독후감을 제출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마무리되었다. 참 단순한 일정이었고, 평소 잘 읽지 않던 재미없는 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도 그 시간이 기다려졌고 마냥 즐거웠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컴퓨터도 없던 때라 남는 게 시간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시립도서관에서 주최한 중학생 연합독서토론회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황순원의 소설 ‘카인의 후예’를 읽고 참가해야 했다. 남학생 한명이 사회를 맡아 진행하였고, 여러 학교에서 모인 학생들이 어설프게 토론을 벌였다. 그때 한 남학생이 책을 읽지도 않고 와서는 책이 시시하다는 둥 흰소리를 하는 바람에 내가 분개했던 것까지 또렷이 기억난다. 도서관이 열어준 작은 공간에서 우리들은 잠시나마 숨통을 트고 활개를 쳐보았던 것이다.
대구에서 유명한 청소년 독서모임도 몇 개 있었다. ‘태양’과 ‘대벗’이라는 이름이 기억나는데,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이 참가하는 연합동아리였다. 동아리는 시립도서관 소속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교육청 소속 시립도서관들이 청소년 독서모임을 활발하게 운영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중학교는 방학독서교실과 연합독서동아리로, 고등학교는 학교 문예반과 정기 시화전, 문학의 밤 행사로 청소년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청소년 문화의 기반이 책과 도서관이었던 것이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대학시절 참가했던 독서모임에서는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그중 어떤 친구들은 오랫동안 민간도서관을 운영해온 나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수만 권의 책을 싸들고 여러 번 도서관 이사를 다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건물을 지으면서 한 층을 내줄테니 도서관을 마음껏 운영해보라고 제안한 친구도 독서모임에서 만났다. 수줍음 많은 영문학과 여학생이 타 학과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며 속을 터놓는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라는 시대와 대학이 내게 준 선물이었다. 동아리와 독서모임을 통해 여러 계층의 친구들을 골고루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주부 등. 30여 년 전 함께 독서모임을 했던 청소년 중 지금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된 이재정 의원이 있다. 당시 여고 1학년이었던 그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여러 책을 같이 읽었다. 국회의원이 된 후 만난 어느 자리에서 그는 오늘의 자신을 만든 건 그때의 그 독서모임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정치인이 되었고, 그와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어떤 친구는 대구 북구 도토리도서관 관장이 되었으며, 또 누구는 여성공간을 운영하는 시민운동가가 되었다.
은평구에도 일요일 아침마다 모여 함께 책을 읽는 낭독모임이 있었고, 몇 번 참가한 경험이 있다. 그들은 5천원의 회비를 들고 모임에 참가하여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정해진 책을 1시간 30분간 돌아가며 낭독했다. 모임이 끝나면 시간이 되는 사람들끼리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점심을 먹을 때는 추가로 5천원을 더 냈다. 매주 진행되는 모임의 참가자들도 마을활동가, 어린이집 원장, 특수학교 교사, 마을기업 직원 등 다양했다. 그들에게 독서모임은 삶의 리듬을 갖게 해주고, 마을에 소속된 느낌을 주는 중요한 매개인 것으로 보였다. 굳이 도서관에 소속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독서모임들은 별도의 안정된 모임장소가 있고, 책을 정하거나 모임을 운영할 수 있는 내부역량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 책을 정해 함께 읽고, 때로는 일정기간 외부강사를 초빙해 도움을 받았다. 도서관 밖 독서모임은 자발성이 더 강하고,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책읽는사회문화재단에서 독서동아리 지원사업을 벌이면서 전국 독서동아리 실태를 두루 파악하는 모양이다. 대구 남산동 독서모임, 서울 양천구 독서모임 등 한겨레신문에 실린 독서모임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그들은 독서모임을 통해 솔직담백한 인간관계를 맺게 되었고, 매번 진행되는 독서와 토론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인식의 확대를 경험한다고 했다.
독서동아리 활성화를 위한 도서관의 전략
전국 거의 모든 도서관에서 독서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으로 대상을 달리하여 월1회나 2회로 진행되는 독서동아리들은 도서관의 중요사업 중 하나이다. 문화프로그램이나 강좌의 후속모임으로 동아리가 시작되기도 하고, 처음부터 동아리를 모집하여 시작되기도 한다. 동아리원은 평균 5명에서 15명까지이며, 연령대도 다양하다.
도서관 독서모임의 장점은 누구나 쉽게 참가할 수 있도록 문턱이 낮고 열려있다는 점, 도서관내 공간에서 안정적으로 모임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 책을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점 등이다. 단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보니 모인 사람들이 다양하여 오히려 모임이 안정되지 않는 점이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본다.
도서관 독서동아리는 개별 도서관의 역량에 맡겨져 운영형태가 모두 다른 실정이다. 동아리의 활성화를 가름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은 담당사서가 동아리에 쏟는 열의인 것으로 보인다. 은평구 구산동도서관마을의 경우 독서동아리는 사서1명이 1개 동아리를 맡는 형식으로 다양한 성격의 동아리가 꾸려져 운영되었다. 종합자료실의 여행책읽기, 추리소설 동아리, 파워독서 동아리를 비롯해 만화, 어린이, 청소년 등 자료실에서 각각 동아리를 운영하였다. 사서들은 독서동아리를 지원하는 기관의 공모사업에 참가하여 받은 약간의 지원금으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만나고 싶었던 작가를 초청해 동아리원들과 즐겁게 모임을 진행하거나, 함께 연극을 보러가기도 했다. 외부지원을 받을 경우 번거로운 일들이 조금 있긴 하지만, 동아리에 새로운 회원이 들어오고 활기를 띠는 계기가 되었다.
반포도서관에도 여러 동아리가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성인동아리가 골고루 있는데, 지금은 비대면 온라인 모임을 개발하여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상 독서프로그램 및 책꾸러미 배부, 줌을 활용한 청소년 독서토론, 밴드를 활용한 성인독서토론을 계획하였다. 각 프로그램마다 홍보를 시작하자마자 당초 목표로 잡은 참가자수를 거뜬히 채웠다.
도서관마다 독서동아리를 운영하는 방식이나 지원형태는 다르다. 동아리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의지를 가진 관리자나 사서가 없다면 기껏 만들어진 모임도 관성적으로 운영되다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 특히 어린이 대상 독서프로그램의 경우 책을 한두 권 읽어주고 소품을 만들기나 그림을 그리는 틀에 박힌 단순 체험 형식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청소년 대상인 경우에도 몇 차례 진행되다가 청소년들의 바쁜 일정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이나 청소년과 책을 함께 읽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고민될 필요가 있다.
오래전 일본의 도서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방문한 도서관마다 책읽어주기를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된 창문이 있는 어두운 동굴 같은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책을 읽어준다고 자랑하는 도서관 사서의 모습에서 아이들에게 책의 즐거움을 알려주려고 노력하는 열정이 보였다.
도서관 독서프로그램의 일차적 목표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고 스스로 즐겨 읽는 평생 독자가 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 단계가 동아리에서 함께 읽기를 통해 생각의 전환과 발전을 경험하며 사람들과의 관계가 만들어지도록 돕는 일일 것이다. 도서관들이 동아리의 개수나 모임 진행회수 같은 실적을 의식한 정량적 수치보다 기본원칙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여건이 마련되면 좋겠다.
독서동아리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점 중 하나가 도서목록과 안정적인 모임장소이다. 모임을 일관되게 이끌어줄 리더 또한 필요하다. 대상별, 단계별로 목록이 개발되면 도서관에서 모임을 진행하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것이다. 더불어 사서와 관심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동아리 운영방법 교육도 필요하다. 이미 정부와 일부 지자체들이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실험과 지원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사례들이 널리 공유되고 확산되어 도서관 기반 독서동아리 활성화에도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란다.
(기획회의 2020.8.20. 신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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