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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도서관 사서는 전문직인가?

도서관에 관심을 갖는 정치인들이 많아졌다. 10여 년 전만 해도 선거철이면 작은 도서관을 짓겠다는 공약이 있었지만, 이제 공공도서관 확충을 공약으로 내거는 후보들이 꽤 있다. 이번 4.15총선에서 586들이 대거 당선되어 세대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586들이 우리 정치에서 할 일이 아직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586세대는 아니지만, 대학시절 사회학도로 들어라 양키들아’ ‘파워 엘리트를 쓴 미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C.라이트 밀즈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번역했으며, 대학 근처에서 서점을 운영한 이력도 있다. 586세대가 대학을 다니던 무렵 웬만한 대학주변에는 사회과학서점을 비롯해 서점들이 여럿 있었고, 그 서점마다 문학과 사회과학, 인문학 도서들이 서가에 가득 진열되어 대학생들을 맞곤 했다. 이른바 책 쫌 읽은 세대인 것이다. 586 정치인들이 도서관을 잘 모르는 이유는 도서관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도서관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제대로 된 도서관정책을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누구보다 열렬한 도서관 옹호자가 될 것이다. , 도서관인들이 도서관의 사명과 역할에 대한 신념과 헌신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진보정권은 도서관에 관심을 갖고 도서관진흥정책을 펼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이 도서관을 거대한 독서실처럼 운영한 것은 민중들의 계몽과 각성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중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여 깨어나는 것은 그들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것도 사회운동처럼 했다. 90년대 초반 내가 운영하던 도서관은 지금의 대형서점 독서코너나 북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커피를 마시며 소파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고,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거나 독서모임을 할 수도 있었다. 당시 우리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책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아리랑같은 책들이었는데, 복본이 5권도 넘게 있었지만 서가에 책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믿기 어렵겠지만, 당시 태백산맥은 이적 표현물로 공립도서관에서 빌리기 어려웠기에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진보적인 사회변화를 열렬히 희망하고 민중들의 각성과 계몽을 원하며, 책과 도서관을 통해 사회 변화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당시 우리 도서관 직원들은 진정한 사서였다.

민간도서관 운영자로서 오랜 경험을 하고 공공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사서직의 전문성과 직업의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소명의식보다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만족하는 사서들의 모습을 보며 실망하기도 한다. 전문직으로서 사서직에 대한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부단히 고민하고 노력할 때에만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대와 중세, 근대의 학자사서, 연구사서

17세기 프랑스의 가브리엘 노데는 최초의 문헌정보학 개론서라 할 수 있는 도서관 설립법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도서관은 모든 민중의 문화적인 세습재산을 보존하는 전 인류의 시설이며, 전 인류의 지식의 보고라고 썼다.

동시대 영국의 존 듀리는 진보적 도서관 관리자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에 의하여 시대는 크게 변혁되었다. 따라서 도서관도 종래의 인습을 타파하고, 민중을 위해서 개방하고 민중으로부터 사랑받는 도서관이 되어야 한다. 자료는 민중의 정신을 함양하고 학문을 향상시키는 일용품이다. 관리자인 사서는 책을 지키고 배급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안내자, 문화의 전달자와 도서관의 중개자이다. 사서는 전문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숭고한 신념과 태도를 가지고 고도의 학문을 함양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우수한 사서로 인하여 도서관은 보편적 학문을 발전시키는 기관이 될 것이다.’

노데와 듀리의 도서관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에 견주어보아도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고대의 도서관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문연구소이자 학술전문도서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곳에 종사하는 관원은 도서의 정리, 대출, 관리만을 담당하는 사무적 혹은 기술적인 문헌직이 아니라, 학문 또는 연구적 성격을 띤 문헌직이었다. 사서는 학자 출신이었으며, 학자가 종사하는 문헌직이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였던 칼리마쿠스와 아플로니우스는 시인이었고, 제노터스와 아리스타쿠스는 유명한 평론가이자 편집자이며, 호메로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중국의 노자는 주나라 문헌실의 사서였고, 조선시대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문한을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이른바 언론 삼사라 불렸으며, 조선시대 청요직의 상징으로 정승, 판서 등 고위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학문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사서로 근무했던 고대, 중세의 도서관들은 오늘날의 공공도서관과는 물론 다르다. 현대의 공공도서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시민들을 위한 공공시설로, 왕과 귀족을 위해 봉사했던 시대의 도서관 사서와 현재의 공공도서관 사서는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대 도서관 사서가 담당했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일부 도서관들은 여전히 최고의 지식정보자료를 수집하고 관리하며,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가벼운 읽을거리에서 비교적 깊이 있는 자료까지 소장하고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동네 공공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의 역할은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서양성시스템에서 학자사서, 연구사서가 배출될 수 있을까 의문이다. 4년제 문헌정보학 학부과정과 대학원 석사, 박사과정이 개설되어 있지만, 교과목들이 큰 차이가 없고 타학문분야에 대한 이해와 융합적인 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적다. 공공도서관 현장에서도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지만, 학부에서 합당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다. 다양한 학문배경을 가진 이들이 대학원과정에서 사서자격을 취득하도록 하여 주제전문사서를 양성하는 미국처럼, 우리도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사서자격을 취득하려고 하면 4년제 대학 해당학과를 졸업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격증의 종류도 1, 2급 정사서와 준사서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사서자격은 더 세분화되어 나누어져야 하고, 각각의 자격은 그에 걸맞은 과정과 교육을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

너무 평준화된 보통 수준의 사서들만 양성하는 대학과, 일정 연수 이상 현장에서 근무한 사서들을 재교육하여 전문직 사서이자 관리직으로 준비시키는 과정이 부실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된다.

 

도서관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춘 전문직 사서로 나아가야

20191월 발표된 제3차 도서관발전종합계획은 개인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도서관, 공동체의 역량을 키우는 도서관, 사회적 포용을 실천하는 도서관, 미래를 여는 도서관 혁신 4가지를 도서관발전 기본방향으로 설정하고 있다. 내용 중에는 도서관 운영체계의 질적 제고를 위해 사서 인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재교육 및 조직역량을 강화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사서역량 및 조직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첫 번째 항목으로 꼽는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에 따라 지식정보를 취급하는 도서관 사서의 역량도 그에 걸맞게 강화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공도서관에서 근무하는 사서에게는 4차 산업혁명이나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보다 더 필요한 능력이 있다. 바로 도서관의 공공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도서관사서로서의 명확한 철학이다. 공공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도서관 직원으로서 공직에 대한 명확한 소신과 철학이 필요하지만, 그와 관련된 소양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교육과정으로만 보건대 우리나라 대다수 문헌정보학과는 도서관 사상과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다. 도서관이 실용중심 학문으로 단순 기능인을 양성하기로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야 도서관사상과 철학은 미래의 사서들에게 꼭 가르쳐야 하는 과정이 아닐까? 학교에서 정작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이 바로 도서관사상과 철학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어떠한 분야든 자신의 일에 대한 자긍심과 전문성에 대한 탐구는 내면의 직업윤리, 철학에서 나온다. 직업윤리와 사명감을 가질 때에만 스스로 자긍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 직업윤리가 있을 때 사서들은 전문성을 갈고 닦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부단히 정진할 것이며, 자존심을 지키며 일할 수 있다. 전문직일수록 직업윤리는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도서관학이 실용적 학문에 가깝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식이었고, 교육과정도 그렇게 운영되어 왔지만, 정작 도서관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의식과 철학이 꼭 필요하다.

공공도서관은 민주주의의 산물이고, 민주주의를 성숙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공기관이다.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해제하고, 도서관이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데는 선각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도서관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해왔다.

사서들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서 스스로 전문가로서 부끄럽지 않은 소양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도서관사상과 철학을 굳건하게 갖추고, 전문가로서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헌정보학 교육과정에서 도서관사상과 철학을 가르쳐야 하고, 사서로서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인공지능 AI 시대에도 지식정보전문가로서 사서들의 역할은 변치 않고 유지될 것이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과 지역대표도서관은 현장 사서들이 전문직 사서로 성장할 수 있도록 충실한 교육과정을 준비하고, 참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정의 교육과정을 거친 사서에게 자격을 부여하고, 전문직 사서가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해줄 때 우리나라 도서관문화는 한 단계 성숙할 것이다.

 

 

기획회의. 2020. 신남희. 서초구 대표도서관장 겸 반포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