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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도서관과 인문학강좌

민주주의 시민교육과 평생학습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공공도서관이 주목받고 있다. 독서와 문화관련 예산이 늘어나면서 도서관 인문학강좌와 문화프로그램들이 풍성하게 개설된다. 시민들이 배우고 성장하며 교류하는 도시의 거실이자 교육문화센터로 도서관의 역할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 경험

아직은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에서 꽃꽂이나 서예 강습 등이 주를 이루던 시절, 인문학강연을 기획하여 시행하며 배우고 성장하였고, 이를 도서관에서 일하는 커다란 즐거움으로 여겨왔다.

1989년 새벗도서관에서 열었던 첫 번째 강좌는 서정오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 쓰기였다. 옛이야기를 입말로 새로 고쳐 써 우리 옛이야기의 재미와 가치를 널리 알린 저자로 유명해진 서정오 선생님은 당시 초등학교 교사이셨다.

우리의 한류를 세계에 알리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원장직을 맡고 있는 김용락 시인도 새벗에서 요청하면 언제든 달려오는 고마운 강사였다. 지역신문 문화부 기자, 문학잡지 발행인, 사회비평 잡지 발행인 등 지역문화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김용락 시인은 강의가 끝나면 혹시라도 강사료와 관련된 민망한 상황이라도 벌어질까봐 황급히 강의 장소를 떠나곤 했다.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유홍준 선생이 대구 예술마당 솔에서 진행하던 강연과 답사는 인기 프로그램이었고, 그 분위기를 타고 새벗도 도서관으로는 처음으로 강연과 답사를 정기 프로그램으로 진행하였다. 연간 답사회원을 모집하여 진행하던 예술마당 솔과 다르게 매번 참가자를 모으고, 답사를 진행하는 형태로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이다.

1993년 새벗문화기행의 첫 답사지는 경주 남산이었고, 12일로 진행한 답사 첫날밤 강연을 맡아주신 남산 지킴이 윤경렬 옹의 길게 드리워진 희디흰 수염과 하얀 두루마기 한복차림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경주 남산의 가치를 알고 사랑하며, 널리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향토 사학자의 꼿꼿한 모습을 보며 돈과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밤늦도록 노래를 부르며 어울리던 첫 답사의 추억 이후, 새벗 답사를 이끌어주던 단골 안내자는 광주의 화가 하성흡 선생이었다. 하성흡 선생은 광주 민예총에서 소개해준 젊은 한국화가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명쾌한 강의를 해주고는, 답사지 주변 풍경을 스케치하러 떠나곤 했다. 얼마 전 광주에서 열린 개인전 소식을 알려온 하성흡 선생은 한국의 미와 이 땅을 살다간 선굵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화가의 눈으로 들려준 또다른 인문학자였다.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성교육 전문가 구성애 선생, 수십 권의 저서를 펴내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 알려지게 된 박홍규 교수, 약자를 위한 경제학을 주창하다 참여정부 정책실장이 된 이정우 교수, 전국을 발로 누비며 길위의 인문학을 설파하는 전주의 신정일 선생, 섬진강에서 나고 자라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던 김용택 시인을 만난 것도 인문학 강연을 통해서였다. 도서관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공부하고, 강연과 답사를 통해 배운 시간들이었다.

정치와 제도 이전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과 문화의 힘을 믿는다. 도서관운동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인문학 프로그램을 정성껏 운영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인문학 프로그램에서 견지하는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인문학 정신에 투철하고, 사회진보와 미래발전방향에 맞는 주제일 것, 둘째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강사를 발굴하되, 자신만의 주제를 깊이 연구해오거나 의미있는 분야에 천착하고 실천해온 이들을 강사로 초빙할 것이다.

확고한 원칙을 갖고 문화프로그램과 인문학강좌들을 운영하니 평소 도서관을 이용하지 않던 이들도 널리 참여하고 도서관측에 감사했다. 시민들과 배움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도서관을 기반으로 한 인문학 부흥이 가능하려면

매년 초 공공도서관은 각종 공모사업으로 분주하다. 인문독서아카데미, 도서관 상주작가, 길위의 인문학 등 문체부 사업을 비롯해, 서울형 북스타트,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등 서울시 사업도 있다. 도서관에서 공모사업에 참가하는 이유는 자체 사업비가 부족한 탓도 있고, 공모사업 선정이 도서관 실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국에서 불과 몇 개의 도서관에서만 실시하던 길위의 인문학이 전국 공공도서관 대부분이 참가하는 수백억짜리 공모사업으로 확대된지도 몇 년이 지났다. 강의와 답사 형식의 프로그램으로 전국 수백 개 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사업규모가 확대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도 더러 생긴다.

이른바 길위의 인문학 기획을 대행해주고, 강사를 연결해주는 업체들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도서관 사업담당자의 기획력 부족과 여유 없음 때문에 생겼을 이 현상이 고착화될 경우 도서관 자체의 역량이 쌓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사업의 질 하락과 불필요한 오해까지 생길 수 있다.

인문학 교육을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사서들이 도서관 현장에서 인문학을 기획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훈련을 받지 못했고, 개인적으로 큰 관심도 없었던 상황에서 업무를 맡게 되면, 베끼기 식의 독창성없는 기획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거나, 베스트셀러 저자 위주의 유명강사들을 선호하게 된다. 인기강사들의 몸값은 계속 올라가지만, 대다수 인문학자들은 대중강연의 기회를 얻기 어려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진다.

참가자들 입장에서는 유명 강사의 강의를 가까운 도서관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으니 좋지만, 인문학이 다른 대중예술처럼 인기인 위주로 소비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인문학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시민들의 인문정신 고양에도 큰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

공공도서관에서 문화기획과 홍보를 담당하는 것은 대부분 사서이지만, 별도로 문화홍보 전담직원을 채용하는 도서관도 있다. 해당 직원이 우수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행여 도서관에 대한 이해가 낮고 인문학에 대한 소양도 높지 않은 직원이 고정적으로 이 분야의 업무를 맡게 될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 지역과 도서관 특성에 맞지 않는 강좌 기획, 외부 업체에 기댄 안이한 사업진행 등 등 부작용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사서들의 경우 순환업무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줄어들 수 있다.

길위의 인문학 공모사업을 주관해온 한국도서관협회는 사서들의 기획을 도와주거나, 담당자를 교육시키는 등 여러 지원을 하고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문화프로그램과 인문학기획 관련 사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런 교육이 더 강화되어야 하고, 대학에서는 미래의 사서들이 인문학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편성할 필요가 있다. 변화하는 도서관의 기능에 발맞추어 현장에서 필요한 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의 역할이 절실하다. 도서관에서도 직원들을 계속 교육하고, 전문성을 키워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도서관 인문학 프로그램은 강의를 듣고 토론에 참가하며 동아리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필요하다. 단순한 지식수용에 그치지 않고, 더불어 나누고 실천하는 기쁨으로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인문독서아카데미나 길위의 인문학 같은 인문학 프로그램 외에도 독서문화와 관련한 여러 공모사업들이 있다.

일부 지자체에서 제한적으로 실시해온 북스타트 사업의 경우 지난해부터 서울시 모든 도서관에서 시 보조사업으로 확대 시행하고 있다. 북스타트 사업은 어릴 때부터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며 책읽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기 위해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영유아 독서프로그램이다. 영유아를 위한 책읽어주기 프로그램과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강연, 북스타트 꾸러미 배포 형태로 진행된다.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한 도서관 한 책 읽기는 사서들이 매년 분야별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서울시 모든 공공도서관에서 저자초청강연, 동아리에서 함께 읽기, 체험놀이 형태 등으로 진행한다. 그 외에도 정보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한 사업 등 다양한 형태의 공모사업들이 있다.

문체부와 서울시 뿐 아니라 과기부, 교육부 등 여러 부처에서 공모형식으로 시행하는 사업들도 있다. 제대로 잘 시행될 경우 의미가 있고, 시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사업들이다. 하지만 공공도서관 현장의 한정된 인력으로 인해 이 사업들을 애초 취지대로 충분히 잘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아쉽다.

규모가 작은 도서관의 경우 사서들은 대출반납, 수서정리 같은 기본업무에다 행정과 문화사업 기획, 홍보, 독서회 운영 등 여러 업무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므로 업무에 대한 피로도가 높다. 도서관별로 효율적인 역할배분이 필요하고, 체계적으로 사서들의 역량을 키워주면서 일을 진행하여야 하지만, 단기적인 성과도 중요하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며 차근차근 나아갈 여유가 없다. 공모사업에 매달리느라 도서관 본연의 업무에 소홀한 경우도 생긴다. 도서관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각종 사업이 밀려들고 있지만, 늘어나는 사업에 비해 도서관 인력 증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민교육과 평생학습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사업이 확대되는 것, 도서관이 그런 역할을 수행할 핵심기관으로 지목되는 것은 바람직하다. 다만 사업 확대에 맞추어 사람에 대한 투자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에 집중하여 하나하나의 사업을 정성껏 진행하고, 매 사업 후 동아리 결성 등 후속모임을 진행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도서관 사업과 더불어 성장하는 사서는 시민교육의 든든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척박한 풍토에서 고군분투하는 인문학자들이 도서관을 기반으로 대중과 호흡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서역량과 인문학자의 동반성장이 이루어질 때 인문학발전의 토양도 굳건해질 것이다.

 

기획회의. 2020.5.20. 신남희. 서초구 대표도서관장 겸 반포도서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