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도 중요하지만, 쾌적한 시설과 충분히 많은 장서를 갖춘 규모가 큰 공공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고 말한다. 동네도서관은 너무 작고, 시설도 충분하지 않으며 보고 싶은 책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서울시민 1인당 도서관 면적과 장서수는 도서관 선진국과 비교해 낮을 뿐 아니라 국내 다른 도시와 비교해도 더 열악하다. 도서관 인프라를 서둘러 확충하느라고 작은도서관들을 많이 지어 공공도서관 기준을 간신히 넘기는 규모의 공공도서관들이 많다.
대형서점에서 독서에 몰두하는 시민들에게 왜 도서관에 가지 않고 서점에서 책을 읽느냐고 물어보면, 서점에는 책이 많고 책을 읽고 싶은 분위기라고 말한다. 동네도서관이 매력적이지 않고 책 읽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는 얘기다.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시립도서관의 경우에는 장서가 많고 규모도 구립도서관보다 크지만, 여전히 열람실 중심이고 멀어서 가기 힘들다고 말한다. 수도 서울 인구가 1,000만이고 지역이 너무 넓어 큰 규모의 도서관도 더 많이 필요한 것이다.
2009년 개정된 도서관법에서는 특별시와 광역시, 특별자치시와 도, 특별자치도가 지역대표도서관을 지정 또는 설립하여 운영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지역대표도서관의 업무는 시도단위의 종합적인 도서관 자료의 수집 정리 보존 및 제공, 지역의 각종 도서관 지원 및 협력사업 수행, 도서관 업무에 관한 조사 연구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에 따라 2012년 서울시청 앞 서울 심장부에 서울도서관이 개관하였고, 전국 시도에서 지역대표도서관을 지정하거나 신규건립하고 있다.
지역 대표도서관 건립과 운영현황
2013년 평소 가깝게 지내던 문헌정보학과 전·현직 교수, 연구자들과 함께 ‘대구도서관포럼’을 만들어 2016년까지 매년 ‘대구도서관발전토론회’를 열었다. 2014년 토론회에서 대구 대표도서관 신규건립 필요성이 제안되었고, 2015년에는 부산대 장덕현 교수를 초청하여 대구보다 한발 앞서 진행중이던 부산대표도서관 건립과정과 역할에 대해 들었다. 2016년에는 당시 서울도서관 관장을 맡고 있던 현 한국도서관협회 이용훈 사무총장에게 대표도서관의 운영에 대해 발표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렇게 대표도서관에 대한 지속적 여론 환기를 통해 대구시는 대표도서관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현재 대구시는 대표도서관 명칭을 시민공모로 하여 ‘대구도서관’으로 정하고, 남구 봉덕동 반환예정 미군헬기장을 부지로 정하여 도서관 건립을 진행하고 있다.
전국 광역시도에 건립하기로 된 지역대표도서관은 이미 개관한 서울, 충남, 울산, 경남, 경북에 이어 올해 ‘부산도서관’이 개관예정이다. 그런데 어렵게 건립된 지역대표도서관이 애초 설립목적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울산지역방송은 2018년 개관한 울산도서관의 관장이 개관 이후 4번이나 바뀌어 행정의 연속성을 잃고 있다고 보도했다. 1만5천제곱미터 규모에 지역 최초 시립도서관으로 건립된 울산도서관이 지역민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애초 설립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백억의 예산을 들여 신규건립된 지역대표도서관 관장 자리가 도서관에 관심도, 의지도 없는 행정직 공무원의 정년을 마감하는 자리가 되어버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역대표도서관으로서 사명과 역할을 자각하고, 신규사업을 계획할 꿈이나 꿀 수 있을까.
사정은 경북대표도서관으로 2019년 개관한 ‘경북도서관’도 마찬가지다. 도서관계 누구도 진행상황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진행된 경북도서관 건립은 경북도청이 있는 안동에 한옥모양으로 지어져 개관하였다. 경북도서관 개관을 알리는 언론보도 자료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조용히 진행된 도서관 운영 실상은 어떠할까. 경북대표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울 정도로 도서관은 행정지원팀 외에, 실질적 도서관운영부서라 할 정책운영팀과 정보서비스팀 직원은 9명에 불과하다. 도서관운영 경험이 없는 행정직 관장과 9명에 불과한 사서 직원으로 경북도서관이 지역대표도서관으로서 소명을 다할 수 있을까? 시설현황을 살펴보아도 경북도서관은 규모가 큰 지역 공공도서관 정도에 머물 뿐 그 이상의 역할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 같지 않다. 그 어디에도 경북의 시군구 도서관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며, 도서관 업무를 조사연구한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도메리에서 지역대표도서관이 공공도서관에서 폐기하는 장서를 모으는 곳이 되고 있다는 도서관인의 글을 보았다. 철학과 방향성도 없이 폐기도서를 모으는 것이 대표도서관의 존재이유와 운영방향에 맞는 일일까. 개별도서관의 장서보존에 한계가 있으니, 대표도서관이라면 지역단위에서 의미있는 장서에 대한 기준을 확립하여 체계적이고 망라적으로 장서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019년 서울시는 동대문구에 서울도서관을 신규건립하고, 5개 권역별로 서울도서관 분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혔다. 동대문구 전농동에 3만5천제곱미터의 도서관을 건립하여 시청앞 서울도서관의 조직과 역할을 옮기고, 권역별로 대표도서관 분관을 건립하여 인문사회과학, 예술, 미디어, 생태, 창업비즈니스로 특화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미국 뉴욕공공도서관 분관이 권역별로 특화된 것에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도서관들이 특화된 주제를 갖고 건립되어 지역민들에게 서비스하는 것은 의미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서울시 소재 공립공공도서관은 2019년 기준 서울시에서 직접 운영하는 서울도서관 1개관과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서울시립도서관 22개관, 각 구에서 운영하는 구립도서관 153개관이다. 자치구도서관과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행정체계 일원화는 오래전부터 추진되어 왔으나, 교육청 도서관의 반대로 진척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주체가 운영하는 도서관들에 대한 효율적 운영체계 확립이 서울시 대표도서관과 분관이 건립되면서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지 궁금하다. 현재 추진중인 도서관법 개정안에 따르면, 지역대표도서관이 공공도서관의 범주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지역대표도서관은 규모가 큰 또 하나의 공공도서관으로 자기 성과를 내기 위해 다른 구립도서관과 경쟁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릴 것 같아 우려된다.
미국 뉴욕공공도서관의 체계 속에서 빛을 발하는 특화도서관들이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실현되는 것도 물론 의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대도시 서울에서는 권역별 대표도서관 분관 하나하나가 지역대표도서관의 역할을 할 필요가 있기에, 실질적인 권역 대표도서관으로서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면 좋겠다.
시민이 참여하여 지역대표도서관을 함께 만들어나간다면
2019년 경기도 대표도서관 건립 관련 100인 토론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남경필 전 경기지사가 수원 광교에 국내 최대 규모의 경기도 대표도서관을 건립하는 것과 관련된 논란을 여러 차례 보도로 접한 터였다. 신임 이재명 경기지사는 100인 토론회를 통해 경기도 대표도서관의 건립지역과 규모에 대한 논란을 잠재우고, 시민들의 공감과 이해를 끌어내기 위해 토론회를 기획한 것 같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 수원 경기도청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가하였을 때,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모여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자리에서 경기도 대표도서관 건립지역과 도서관 규모에 대한 시민합의가 도출되었고, 토론회를 기점으로 경기도는 도서관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토론회에 참가했던 경기도민들은 아마 대표도서관 건립에 자신도 참여했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토론회가 애초 경기도에서 의도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형식적 과정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그 과정 자체가 상당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한다. 도서관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는 아직 상당히 상충되는 측면이 있기에, 모든 내용을 공개하고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도서관과 지역분관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매우 높다. 서울시는 전문가 용역을 바탕으로 도서관건립에 대한 화려한 청사진을 준비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규모가 크고 멋진 도서관이 건립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시민들의 자긍심과 애정이 깃든 서울의 명소를 만들기 위해 시민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여러 방법을 건립과정에 적극적으로 도입해보면 어떨까.
은평 구산동도서관마을의 경우 건립을 구청에서 결정하였지만, 건립과정에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건립 후에도 주민들이 운영에 참여하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도서관은 단순한 구립도서관이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자긍심을 갖고 애착하는 진정한 주민들의 도서관이 될 수 있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의 다양한 공간과 독특한 운영은 주민들의 목소리가 실질적으로 반영된 결과이다.
이제 세계에 자랑할 만큼 크고 멋진 도서관을 세우겠다고 서울시가 공표한 서울대표도서관과 분관 건립도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혜를 모으면 좋겠다. 시민과 도서관계가 두루 참여하는 ‘도서관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도서관 건립과정을 함께 해나가면 어떨까. 공무원과 정치가가 아닌, 건축가와 도서관전문가와 도서관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도서관 운영모델을 함께 고민해보면 어떨까.
도서관 관장 선임, 장서구성, 프로그램 운영에 대해서도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되면 좋겠다. 도서관운영위원회의 권한을 단순한 자문기구가 아닌, 도서관위원회로 격상시켜 시민들이 직접 도서관을 운영하도록 하면 어떨까. 시립도서관을 위한 기금을 모으고 관장을 선임하고, 도서관을 운영하는 미국식 모델을 우리도 적극 도입하여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해보면 어떨까. 지역대표도서관이 새로운 사고와 운영철학으로 시민과 함께 하는 도서관이 될 수 있도록 시민의 지혜와 열정을 모으고, 그 과정 자체가 책과 도서관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함께 지켜나가는 시민운동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기획회의 2020.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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