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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

나와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누구에게나 생각의 뿌리가 형성되는 계기가 있다. 우연한 기회에 도서관의 길에 접어들었던 나는 도서관에 대한 이론적 기반없이 도서관을 운영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도서관학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싶어 2005년 가을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당시 거주하던 지역이 아닌 부산대학교를 굳이 선택한 이유는 김정근 교수님께 배우고 싶어서였다. 책을 통해 이미 그분의 생각을 조금은 알고 있던 터였다. 막상 학교에 가보니 김정근 교수님은 정년퇴임을 얼마 남겨놓지 않으신 터라 시간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오랜 노력으로 일구어놓은 연구진과 연구성과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김정근 교수님이 부산대학에 문헌정보학과를 개설하여 연구작업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도서관과 관련한 연구물들이 다수 책으로 발간되었다. 한국사회과학의 탈식민성담론, 학술연구의 방법론, 학술연구에서 글쓰기의 혁신, 우리 도서관학의 철학과 방향성에 대한 탐구 등 연구분야는 넓고 깊었다. 무엇보다 우리 도서관의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추상같은 기개가 돋보였다. 나로서는 아쉽게도 부산대학에 갔던 시기가 너무 늦어 배움의 시간이 길지는 못했지만, 김정근 교수님의 도서관학에 대한 정신은 지금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당시 나는 도서관인들이 소통하는 매체에 글을 한편 기고했다. 오래된 글이지만, 지금 이 시기에도 우리 도서관계에서 김정근 교수님의 도서관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기에 인용해본다.

 

다음은 ‘나와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공동작업실’이라는 글의 전문이다.

첫 시간에 이용재 교수님이 도서관의 ‘도’자도 모르고 도서관을 만들고 시작해서 15년 이상 도서관을 운영해왔다고 저를 소개했는데, 맞는 말입니다. 도서관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학창시절에 이용해본 학교도서관과 폐가식으로 운영되었던 80년대 초반 공공도서관의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는 바램을 갖고 있던 저는 도서관운동이라기보다는 도서관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시민운동을 고민하면서 도서관을 설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도서관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참여와 호응은 놀라웠습니다. 대구 시민들은 적게는 몇 만원에서 많게는 일천만원까지 기금을 내었고, 시민기금으로 설립된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습니다. 바로 옆에 대구시립중앙도서관이 있었음에도 우리 도서관을 찾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굳이 작은 민간도서관을 찾았을까? 저에게는 그것이 한 의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도서관다운 도서관에 대한 고민이 싹트게 되었고, 시민들이 도서관에 대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주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도서관에 대해 눈떠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만난 책이 1995년 김정근 교수님의 「한국의 대학도서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이었습니다. 비록 대학도서관에 대한 책이기는 해도, 제게는 그 책이 한국의 도서관 전반을 통찰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아 우리나라 도서관 현실을 이렇게 고민하는 도서관학자가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97년 「디지털 도서관 ; 꿈인가 광기인가 현실인가」라는 책을 읽고 부산대 공동작업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만나보고 싶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1998년 경주에서 열린 도서관대회에서 제가 운영해온 새벗도서관이 독서문화상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날 김정근 교수님을 만났고, 언젠가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어려움때문에 실현되지 못하다가 지난해 겨우 그 오랜 꿈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오기 전에는 부산대 문헌정보학과 공동작업실에서 그토록 많은 저작들이 출판된 것은 알지 못했고, 지난해 비로소 책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공동작업실의 책들은 기본적인 현실인식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서관학이 해방 후 서양, 그것도 미국의 학문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학문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뼈저린 각성에서 시작하여, 우리학문 전반이 지닌 식민성으로 인식을 확장합니다. (「한국사회과학의 탈식민성담론 어디까지 와있는가」) 학문의 식민성에 대한 인식은, 한국의 도서관학자들이 우리 도서관 현장에 관심을 갖지 않고 미국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사유하고, 연구하는 경향에 대한 인식입니다.

도서관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과정을 돌이켜보면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어느 학문이든 학문의 식민성을 극복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학문을 하자’고 주장한 선각자가 있었듯이 도서관계의 독립선언은 부산대 문정과가 주도한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인식의 과정이 여러 권의 책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도서관 현장을 구체적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용재 교수의 「주제화를 통해 본 한국 대학도서관의 현단계」, 김종성 교수의 「한국 학교도서관 운동사」, 이연옥 선생의 「한국 공공도서관운동사」, 장덕현 교수의 사서의 일상생활을 통해 본 부산지역 공공도서관, 김순화 사서의 울산 공공도서관에 대한 관찰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수서업무의 현단계」, 이수상 교수의 「한국문헌정보학의 현단계」, 김영기 교수의 부산지역 도서원 현상에 대한 고찰, 양재한 교수의 창원 마을도서관 현상에 대한 관찰 등등.

이러한 연구대상의 구체성은 ‘지금 이 자리 우리 도서관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연구하는’ 실사구시적 학문풍토의 결과입니다.

장덕현 교수의 논문이나 박인웅, 이연옥 선생의 「공공도서관 자료선정과 구입의 현단계」, 김영기 교수의 「공공도서관 장서를 통해 본 한국사회 지식의 흐름」, 김순화 사서의 논문 등을 보면서 구체적인 도서관 현장을 관찰하고 문제점을 도출해내었다는 점에서 놀라움과 신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부산 ·울산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대구지역도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우리 도서관 현장의 여러 문제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김영기 교수가 부산지역 도서원 현상에 대한 고찰에서 도서원 현상을 이용자의 확대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직접 그 안에 몸담고 생활해온 제게는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전국에 100여 개이상 생겨나 주민 속에서 활동해왔고, 2000년이 넘은 지금도 활발하게 생겨나고 있는 민간도서관 현상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가진 귀한 연구라고 생각합니다. 이용자의 확대라는 도서원운동의 성과가 지금 우리 공공도서관에서 제대로 계승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짚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계승되고 있지 않다면, 혹여 우리 도서관 현장은 고민의 치열성이 부족하거나 주민속에 더 깊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양재한 교수의 「공공도서관의 성립과정과 사회역할」에서는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 소멸되어가는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고, 도서관 이용자의 외연을 확대시킨다는 의미에서 마을도서관의 의의를 고찰한 연구주제가 돋보였습니다. 연구자가 직접 마을도서관 설립과정에 참여하여 그 과정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특히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도서관이나 학교도서관 운동사에 대한 고찰은 도서관을 발전시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분들의 역사를 기록한 의의 외에도, 자칫 단절되어 버릴 수 있는 귀중한 도서관의 역사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기록했다는 귀중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부산대학교 도서관의 정치학, 교육학 분야의 장서를 분석하여 문제점을 이끌어낸 점도 구체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간 좋은 사례로 보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풍부한 현실인식을 더욱 빛나게 한 연구방법론의 혁신입니다. 공동작업실의 연구방법은 기존의 통계중심의, 상식적인 수준의 결론이 뻔히 정해져있는 양적연구가 아닌, 참여관찰과 심층인터뷰를 기본으로 하는 질적 연구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직접 그 현장에 들어가 장기간 관찰하고 심층 인터뷰하여 대상의 본질을 정확히 통찰하고 핵심을 꿰뚫는 방식입니다. 문화인류학이나 사회학 등 다른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널리 채용되어 온 질적 연구방법을 문헌정보현상 관찰과 연구에 처음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게다가 연구대상의 구체성과 연구방법의 적실성이라는 내용을 새로운 글쓰기로 표현하였습니다. 어렵고 재미없기로 소문난 학술논문의 글쓰기를 재미있고 생동감 있게 바꾼 것입니다. 저 같은 비전공자가 보아도 재미있는 글, 힘차고 생동하는 문체, 생생한 현장이야기 등이 내용을 더욱 빛나게 한 것입니다. 현장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어려워하면서도, 학계의 논문이 지닌 추상적인 주제와 난해한 글쓰기 때문에 외면하고, 학계는 현장의 제 문제와 분리되면 분리될수록 더욱더 이론을 위한 이론, 공허한 학문으로 천상을 헤매고 있을 때 공동작업실의 글들은 신선한 한줄기 햇빛이자 소금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공동작업실의 이론적 성과들이 우리나라 문헌정보학계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리라고 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학계의 많은 분들이 우리 도서관 현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서나 도서관 밖에서 도서관을 사유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우리나라 도서관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 노릇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공동작업실의 학문적 성과들이 단절되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도서관계와 도서관 현장은 해결해야 할 숱한 과제들을 안고 있으며, 아직도 우리 도서관이 선진국형 도서관으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높고 험하게 보입니다.

경제발전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사회의 민주화도 성숙되어가는 지금이야말로, 우리나라 도서관도 형식과 내용이 골고루 성숙할 수 있는 시기에 접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발전의 한몫을 우리 문정인들이 담당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2005년 4월 28일 도메리, 2020.10.5.기획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