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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나의 이야기

박지원-새 세상을 설계한 지식인

올바른 삶과 진리를 추구한 지식인 박지원을 만나다 (박지원-새 세상을 설계한 지식인 /이강옥 /다섯수레)

 

“갓난아기는 태어나자마자 통곡을 한다. 갓난아기는 어떤 감정을 느꼈기에 그렇게 우는 것일까?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에는 어둠 속에서 얽매이고 짓눌린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드넓은 데로 나와 손을 펴고 다리를 뻗게 되어 정신이 시원스레 트이니, 어찌 참된 목소리를 내질러서 감정을 남김없이 한바탕 쏟아 내지 않으리오! 나도 그 꾸밈없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본받고 싶다.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며 그곳을 통곡 장소로 삼을 만하고, 장연 금사산에 가서 그곳을 통곡 장소로 삼을 만하다. 이제 요동 벌판을 바라보니, 여기서부터 산해관까지는 일천이백 리나 되는데 사방 어느 곳이든 산 한 점 없으며, 예나 지금이나 비 뿌리고 구름 피어나는 가운데 오직 끝없이 아득할 뿐이니, 이곳을 통곡 장소로 삼을 만하다.”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음력 5월에 길을 떠난 사절단은 6월에 압록강을 건넌 뒤 요동 벌판을 지났다. 요동 벌판은 넓고 넓어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만 보였다. 팔촌형 박명원의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낀 박지원은 광활한 요동 벌판을 보고 그 감격을 ‘통곡하기 좋은 장소’라는 글에서 표현했다. 넓디넓은 벌판을 보고 박지원은 왜 하필 통곡하기 좋은 장소라고 했을까?

조선시대의 문인 박지원을 처음 만난 것은 중국기행문『열하일기』에 나오는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며’라는 글을 통해서였다. 그 웅혼한 문체며 호방한 사상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으며,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문학가로서 박지원의 삶과 사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을 위해 고전을 쉽게 풀이한 책을 여러 권 낸 영남대학교 이강옥 교수의 『박지원』을 읽었다. 쉽게 쓰였으면서도 박지원의 삶과 사상을 잘 요약하였다. 노론 명문가였던 집안배경과 아버지 묘터를 둘러싼 세도가 집안과의 분쟁, 사랑하던 친구의 처참한 죽음 등이 잇달아 닥치면서 청년시절 박지원은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꿈을 접게 된 것 같다. 당시 과거제도는 이미 박지원과 같은 큰 문인을 품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타락해 있었다.

 

박지원은 젊을 때부터 우울증과 불면증 등에 시달렸으며, 병을 다스리기 위해 이야기꾼을 불러 이야기 듣기를 즐겨했는데, 그때 쓴 작품이 『민옹전』,『광문자전』 등이다. 『양반전』,『허생전』,『호질』 등에서는 양반의 위선과 당시 경제체제, 사회상을 비판하였다. 가장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똥 푸는 사람’을 기꺼이 친구로 여기고 존중하는 『예덕선생전』같은 작품을 보면, 조선시대 양반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앞선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글재주를 가졌으면서도, 불의를 미워하는 꼿꼿한 성품에다 비판의식이 강했던 박지원에게 적이 많았을 것은 당연한 일. 그를 사랑하고 아끼는 벗들도 많았지만, 비방하고 질시하는 무리도 많아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뒤늦게 벗 유언호의 추천으로 벼슬살이에 나서게 된 연암은 경상도 안의 현감 등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그가 얼마나 고을을 잘 다스렸는지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안의 마을 사람들은 새 사또가 부임할 때마다 ‘예전 박 사또 같기야 하겠어?’라고 할 정도였으며, 늘 박 사또 시절의 좋았던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한편 정조는 사대부들의 문체가 날로 타락하고 있다고 걱정하면서 이를 바로잡으려고 했는데 이를 문체반정이라고 한다. 이런 와중에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단속 대상이 되었으며, 정조는 중국의 통속소설과 소품 단문에 영향을 받은 새로운 문체를 유행시킨 사람이 박지원이라고 주장하며, 반성문을 바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정조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그에게 이런저런 벼슬을 제수하기도 했다. 이강옥 교수의 책에서 위대한 문학가로서뿐 아니라 효자이자 자애로운 아버지이며, 유학자로서 올바른 삶을 추구한 참된 지식인 박지원을 만날 수 있다.

- 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201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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